★ 성인 성녀/성녀 글라라 st.Clara

[스크랩]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Pietro Rossi지음

Skyblue fiat 2011. 4. 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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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여는 글

독자 여러분이 성녀 클라라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여러분에게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오래전부터 무의식적으로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과 같으면서도 또한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다른 점이 하나의 초대이며 선물이 될 것입니다.

8세기 전 아시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모험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클라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처녀가 기도하기 위해 성 루피노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강론대에서 청녀 프란치스코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타락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동 받은 클라라는 주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하며 프란치스코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려는 이 선택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매우 부유한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클라라에게는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이 선택은 확고했고 신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클라라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한 친구와 함께 급히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향하였습니다. <잔꽃송이>는 그날 밤은 어느 밤보다 더욱 밝았고, 높은 하늘의 별들은 클라라를 주시하며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클라라는 무릎을 꿇어 제대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금발을 자르고 수도복을 입혀주며 화려한 벨트 대신 거친 허리띠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젊은 여인은 놀라움과 함께 진정한 행복의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큰 꿈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아시시의 오늘도 클라라의 위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찾아내어 소유하는 일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습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녀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가 여러분을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피어트로 로씨(Pietro Rossi)OFM

 

성녀 클라라를 소개하며

교회 역사 안에 찬연히 빛나는 한 성녀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온 생을 바쳐 걸어간 삶으로 인해 그 이름만큼 광휘가 돋보이는 성녀가 있습니다. 13세기의 어두움을 매경 삼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 성녀의 이름은 클라라입니다.

성녀 클라라는 위대한 성인 프란치스코와 삶의 자리와 역사를 함께 합니다. 같은 아시시에서 나고 자랐으며 동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여정에서 진실한 동반자였습니다. 이 두 성인은 누구보다도 서로의 영적 갈망을 이해하고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 안에서 이를 추구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을 준 참된 동료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가고자 했던 가난을 통해 하느님께 이르는 길에서 클라라만큼 뛰어난 제자는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지녔던 이상과 가난의 가치를 클라라만큼 충실하게 보존하고 꽃 피워나간 제자는 없었습니다.

클라라는 첫 번째 프란치스칸 여성인 동시에 가장 충실한 제자이고 진실한 동반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분리해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그늘에 가려 그 빛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클라라는 교회 역사상 최초로 회칙을 쓴 여성이며,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허락하지 않는 교황에게서, 안정된 생활 수입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의 특전’을 끝까지 얻어낸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철저한 신분사회 중심인 당신의 관습을 깨고, 자매들을 섬기며, 자매들과 함께 ‘자매애’를 이뤄낸 어머니였으며, 봉쇄의 담장 안에서 수많은 기적을 이끌어낸 기적의 여성이었습니다.

성녀 클라라 탄생 800주년을 기점으로 이 위대한 성녀의 삶과 정신이 새롭게 조명되고 연구되고 있음은 다각적으로 불안정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성녀 클라라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이탈리아의 피에트로씨(Pietro Rossi)OFM 신부님이 1989년 펴낸 작은 책자입니다. 로씨 신부님은 클라라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사랑이 담긴 관찰자의 시선으로 따라가며, 평이하고 쉬운 언어로 물 흐르듯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이하고 쉬운 언어에 담긴 깊이는 결코 얕지 않습니다.

저희는 로씨 신부님의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이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성녀 클라라의 향기가 엷어지거나 혹은 다른 내음을 뭍히지 않을까 저어하여 조심스레 한 문장씩 옮겨왔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축일을 맞아 이 책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성녀 클라라의 진솔한 모습을 만나고, 그 그윽한 향기 속에 잠기게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의 아시시

많은 순례자들이 아시시로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아시시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돌에서조차 신비로운 흔적들을 발견해 나간다.

아시시는 누구에게나 제공해 줄 것이 많다. 좁은 길의 침묵과 성당의 어스름함은 평온함과 평화로 가득하다.

창가에 놓인 꽃들과 술래잡기하듯 울려 퍼지는 수많은 성당의 종소리들은 기쁨의 찬가이며, 끊이지 않는 삶의 노래이다.

아시시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방인이 될 수가 없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정면의 광장은 그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팔을 벌려 안아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아시시는 영적으로 ‘성벽이 없는 도시’의 대명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아시시는 현재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나자렛 다음으로 이 세상의 그리스도교 도시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이다. 1)

 

클라라의 탄생

하느님과 사람의 축복을 받은 이 도시에서 1193년 7월 16일 오프레두치오 가문의 클라라가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오르톨라나 피우미는 해산하기 전에 다음 목소리를 들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세상을 밝게 비춰 줄 하나의 빛을 낳을 것이다.”2)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특별한 교양과 종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그가 쓴 <성 프란치스코의 제1생애>에서 클라라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은총으로 인해 가일층 고귀해졌다. 그녀는 육신으로 동정이었고 정신으로 지극히 정결했으며 신적 사랑에 대한 욕망에서 열렬했다. 천부적으로 지혜를 지녔고 겸손해서 탁월했다. 이름은 영롱이었고 생활은 더욱 영롱했으며 품행은 더더욱 영롱하였다.”3)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당시 처녀들은 매우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처녀들은 보통12살, 혹은 14살에서 16살이 되면 신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처녀들이 신랑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에 의해 혼인이 정해졌다. 어떤 소녀들은 아직 요람에 누워있을 때 정략적으로 혼인이 정해지기도 하였다.

클라라의 어머니와 친구들은 청혼하는 귀족청년들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클라라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 삼촌이자 후견인인 모날도는 종종 불평을 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이 소녀는 그 많은 구혼자들 중 어느 누구와도 정혼을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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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시에 관한 여러 간행물 중에 실용적이고 잘 알려진 몇몇 책자를 소개하겠다. 스타니슬라오 마이아렐리의 ,아시시., ,프란치스칸 여정.; 아바테의 <클라라의 고향 아시시>; 포르티니의 <중세시대의 아시시>; 데스보넷의 <성 프란치스코의 길에서>; 베라르도 고씨의 <아시시 프란치스코로의 초대>; 지오르지오 후드린의 <프란치스코, 클라라, 그리고 그 외의 인물들>; 루치아노 카노니치의 <프란치스카니즘의 모든 것>.

2) 오르톨라나는 성 루피노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에 이 계시를 받았다.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딸의 이름을 글라라(영롱)라고 지었다. 후에 다시 그 계시가 떠올라 친구들과 클라라 자매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3) <1첼라노> 18. 이 기록은 클라라가 아직 살아있을 때 첼라노가 쓴 것이다. 그 당시 아시시의 부유하고 명망있는 가문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클라라는 도시의 상류층인 소수의 귀족 가문들에 속해 있었다. 아시시에는 오프레두치오 가문을 비롯하여 테발디, 콤파냐니, 코라니, 지슬레리, 피우미 가문 등이 있었다.

4) 클라라는 어머니로부터 확고한 신앙심을 물려받았고, 아버지로부터는 매우 강인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녀의 결심을 꺽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시성 조사 과정에서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얼굴이 아주 예뻤기 때문에 청혼자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시성조사 증언록> 18,2).

 

5) 글라라의 아버지인 오프레두치오의 파바로네는 1211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상 그는 클라라와 아네스의 가출사건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삼촌인 모날도가 가문을 이끌어 나가고, 클라라와 아네스의 후견인이된다(데오도시오 롬바르디<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바로 이 점에서 피렌체의 마리아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인 아네스와 베아트리체가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인 파바로네 경이 사망한 뒤 신심 깊은 어머니 오르톨라나와 역시 기사였던 삼촌 모날도의 보살핌 하에 자랐다.”(조반니 보칼리 <아시시의 가난한 여인들의 천사같은 어머니 -성녀 클라라의 말씀의 존엄성과 위대함에 관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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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

어느 날 클라라는 기도하기 위해 성 루피노 성당에 들어갔다. 강론대에서 베르나르도네의 프란치스코가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고 있었다.6) 그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들이 충만한 자유 속에서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리스도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확고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는 클라라의 영혼을 움직였다. 클라라는 그가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명 받은 그녀는 자신도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며 살아갈 것을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프란치스코와의 만남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는 친구와 함께 성 밖에 나갔다가 프란치스코를 만나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클라라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클라라에게 다가가서 부드럽게 말했다. “클라라, 사람은 잘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프란치스코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고 말하자, 클라라는 “알 것 같아요, 하지만 프란치스코, 당신이 저를 도와준다면 정말 좋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프란치스코는 계속 말하였다. “클라라, 당신은 목마름과 고독과 배고픔과 추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매는 당신이 태어난 화려한 집과 부유함 속에서 받은 사랑, 이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합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지요, 나는 가난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분에게 충실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클라라는 “프란치스코, 가난 부인 외에 그 누구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군요, 저는 다만 저를 도와 달라는 것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생활양식, 당신과 같은 기도, 그 무엇보다 당신처럼 가난한 삶을 원할 뿐입니다.”7)

 

고요한 삶을 꿈꾸다

클라라는 새로운 이상적인 삶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하였다. 그 이상은 바로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분과 같이 가난하게 살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처럼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봄은 이미 수바시오의 장밋빛 암석을 수줍게 어루만지고 있었고, 젊은이들과 소녀들은 축제 옷 위에 품위 있는 망토를 두르고 아시시의 거리를 분주하게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라는 이런 것에서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고 기도에 전념했다. 다만 창밖으로 성 루피노 성당 앞 광장에 비치는 햇살을 응시하며 흡족해 하곤 했다.

 

프란치스코를 신뢰하는 클라라

어느 날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만나기로 결심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신뢰하여 그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에 온 클라라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마치 대 성당에서 설교하던 것처럼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론대가 아닌 클라라 개인에게 말한 것이었다. “클라라! 지금이야말로 오직 당신을 위한 때입니다.”

이처럼 진실하고 솔직한 만남은 그녀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을 거두어갔으며, 영혼을 맑고 온화하게 만들었다.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다

클라라의 맑고 파란 눈동자가 프란치스코에게 고정되는 순간 그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말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게 살려는 나의 원의는 이제 확고해 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집으로부터 도망하려고 결심한 동기입니다. 그르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에게 단순하게 말했다. “클라라, 주님께서 영감을 주시어 자매가 집을 떠나온다면 나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나의 형제들과 함께 자매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작별인사를 하기 전에 추가 날짜를 성지 주일 밤으로 정했다.

 

올리브 가지

그해(1211년) 성지주일 3월 27일이었다.8) 클라라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하러 주교좌 성당으로 갔다.

성지주일 미사는 성지가지 축복예절과 팔마 가지를 나누어주는 예식으로 매우 길었다. 여기에다 행렬과 독서, 기도 그리고 주님의 수난기로 이어졌다.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클라라는 자리에 앉아 침묵 가운데 오늘 밤 집을 떠나는 것과 다시는 집으로 동라가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귀도 주교가 팔마 가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을 때 클라라는 머리를 숙이고 꼼짝하지 않은 채 자리에 남아 있었다. 주교는 클라라가 나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를 처다 보았다. 그리고 영감을 받은 듯이 부제들을 동행하고 제대를 내려와서 클라라에게 다가가 팔마 가지를 건제주고 축복했다. 클라라는 주교 반지에 입을 맞추고는 팔마 가지를 받아들고 감격하여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기도하였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

 

한 밤중의 도

안 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 클라라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 날은 그녀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을 행복한 하루였다.

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축제 의상위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는 베일을 쓰고 ‘죽음의 문’9)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나가고 싶었고 이 문으로 빠져나가면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클라라는 가냘픈 손으로 굳게 닫혀 있는 출입문의 나무들과 도구들을 하나씩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힘껏 빗장을 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갈 수 있는 길이 펼쳐졌다.

 

친구가 그녀를 기다리다.

클라라의 절친한 친구인 파치피카 구엘푸치오는 길모퉁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재빠른 걸음으로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잔꽃송이>는 말하기를 그날 밤은 어느 밤보다 더욱 밝았고 높은 하늘의 별들은 클라라를 주시하며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두 명의 형제들이 횃불을 들고 숲 가장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풀을 헤지며 저만치 빛나는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은 바로 포르치운쿨라였다.

 

참 자유를 얻다.

프란치스코는 성당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클라라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맞이하였다. 감동을 받은 클라라는 성당으로 들어가서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잠시 동안 기도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신발을 벗고 비단으로 수놓은 화려한 옷을 벗어 버리고 허름한 수도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화려한 벨트도 거친 허리띠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인 채 마지막 봉헌예식을 기다렸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금발을 조심스럽게 모아 잡고 천천히 자르기 시작했다.10) 클라라의 금발이 다 잘려지자 예식은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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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클라라도 프란치스코처럼 도시의 성벽 안에서 살았다. 클라라의 집은 성 루피노 성당에서 멀지 않았고 거기서 성당 광장을 

볼 수 있었다. 후에 성당 소유지로 넘어갔다(아나클레토 야코벨리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참조).  

7) 클라라와 프란치스코의 만남은 많은 작가들의 관찰 주제가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오르지오 후드린은 이렇게 서술한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그들을 갈라놓는 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주 만났다. 그들의 동지애는 더 큰 사랑을 위한 사랑이었기에 열정을 승화시켜 주었으며 그들을 서로 끌리게 만들었다.”(<클라라. 프란치스코, 그리고 그 외의 인물들>) 파우스타 카솔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영원함에 대한 일치를 보이고 서로의 영적인 본질을 파고들었던 이 두 영혼들의 환희를 누가 모사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 젊은 여인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 화제에 올랐다.”(<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카를로 카레토는 현대적인 어조로 프란치스코의 입을 통해 말한다. “나는 클라라가 어떤 성경의 소유자인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나는 어느 면에서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가나함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회개한 이후 최초로 나는 어떤 확고하고 진정하며 확실한 것에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프란치스코 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책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성녀 클라라의 전기>; 마리아 스티코 <성 프란치스코>; 테오도시오 롬바르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나자레노 파브레티<클라라>

8) 역자 주: 프란치스칸 가족들은 전통적으로 1212년 3월 18일을 ‘성녀 클라라의 출가 기념일’로 지낸다.

9) ‘죽음의 문’은 오직 죽은 자의 관을 내보낼 때 열고,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항상 닫혀 있었다. 그 문은 평소에는 빗장으로 잠겨 있고 나무더미와 사용하지 않는 가구들로 막아 놓았다. 

10) 클라라의 친구인 파치피카 구엘푸치오가 글라라의 잘려진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현재는 매우 귀중한 성물상자에 담겨져 성녀 클라라 대성당 성녀의 무덤 옆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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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수도원으로 피신하다

예식을 마친 후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에게 가족의 반발을 염려해서 서둘러 떠날 것을 제안했다.

클라라는 베르나르도 형제와 함께 성 바오로 수도원을 향해 페루지아로 향했다. 미리 통보 받은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11)

클라라는 아주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베네딕도 수녀들은 클라라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부엌일과 가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클라라를 걱정하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 형제는 즉시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갔다. 형제들이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베르나르도 형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프레두치오 가문은 매우 부유하고 권세 있는 가문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프란치스코는 이에 개의치 않고 형제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가 귀도 주교님께 가서 클라라 자매가 다미아노 성당에 거처할 수 있도록 부탁하겠습니다.”12) 근심에 사로잡힌 베르나르도가 말했다. “오, 주교님이 사부님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새로운 수도회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처럼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수도회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입니까?”

프란치스코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들을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부인들이라고 부릅시다.”

 

가족들의 반응

예견된 것처럼 클라라 가족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도망친 것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성 바오로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태세로 문을 부수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클라라만을 원했던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갖은 협박을 동원하여 클라라를 겁주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클라라는 확고부동했다. 어떤 협박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이제 감언이설로 클라라를 회유하고자 했다.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족 모두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하지만 클라라는 아주 단호했다. 그녀는 이 수도원 안에 있는 것이 저택에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3)

 

제단에 매달리다.

그들이 이성을 잃고 난폭하게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자, 클라라는 그들의 헛된 희망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 즉 성당으로 도망쳐 제대를 향해 뛰어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제대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매끈하게 밀어버린 머리를 내보였다.

클라라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은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 몸이며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확고한 태도에 가족들은 클라라를 포기하고 수도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14)

 

성 안젤로 수도원으로 옮기다

클라라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며칠 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아마 그녀로 인해 일어난 소동을 겪은 후, 그곳의 수녀들이 클라라에게 떠나도록 간청했는지도 모른다.

클라라의 거처를 옮기는 일을 담당한 사람은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다시 베네딕도 수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로부터 그녀를 판조의 성 안젤로 수도원으로 데리고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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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시시로부터 4Km 떨어진 바스티아 움브리아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과 수도원은 아시시 주교의 통치 하에 있었다. 

12)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이미 클라라와 그녀의 동료 자매에 대해 예언한 바가 있었다. 클라라는 유언에서 이 사실을 생생한 감동으로 전한다. “아직 형제들이나 동료들이 없었던 성인께서 회개하시자마자 즉시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고 계실 때... 그분은 큰 기쁨과 성령의 비추심으로 주님이 그 후에 성취해 주신 우리에 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때 그분은 위에 말한 성당의 벽 위로 올라가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불란서 말로 여러번 말했습니다. ‘와선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짓는데 나를 도와주십시오. 사실 이곳에서 부인들이 살게 될 것인데,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영예롭고 거룩한 생활로써 당신의 거룩한 온 교회 안에서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성녀 클라라의 유언> 4 

13)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02년의 칙서를 통해 성 바오로 성당과 수도원에 전적인 보호 구역 권리를 보증하였고, 만약 그곳에 피신한 자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 파문할 것을 선언하였다. 

14) 이와같이 성당과 수도원들은 실제로 이 성역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누렸다. 그곳에 대해서는 아무도 심지어 활제조차도 파문형을 피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는 남자나 여자를 데려갈 수 없었다. 이 시기는 위험한 시기여서 많은 도망자와 박해를 피해온 자들이 보호를 요청하는 일이 빈번했다. 도망자는 박해자의 폭력을 두려워하여 살아남기 위해 제단에 매달리고 그 덮개를 강하게 붙잡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도망자인 성녀 클라라도 거룩한 교회를 상징하는 제단의 덮개 끝자락을 붙잡는 행위를 통해 안전함을 누렸던 것이다. 

15)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회개 초기의 프란치스코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를 수바시오 수도원에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모체가 될 포르치운쿨라를 그에게 맡겼고 이번에도 클라라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감사의 표시로 프란치스코는 매년 수바시오 수도원을 방문하여, 물고기 한 바구니와 올리브기름 단지를 수도원장에게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형제들도 이 아름다운 관례를 따라 현재까지 이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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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평화를 얻다

성 안젤로 수도원의 정적과 고요 속에서 클라라는 자신의 삶의 이상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성 베네딕도 회칙의 규율을 따랐다. 이 회칙의 토대는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클라라는 성 베네딕도 회칙을 받아들일 뜻이 없었다. 클라라가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따르려고 했다면, 밤에 포르치운쿨라를 향해 도망친 일이나 프란치스코를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려는 결심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16)

 

클라라의 밀월

클라라는 몇 주 동안 성 안젤로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 기간은 그녀에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함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클라라는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주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집으로부터의 도피는 세상을 등지게 하고 하느님 신비의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클라라의 삶은 기쁨의 은총과 순수함 안에서 기도와 관상이라는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변화되었다.

클라라는 이렇게 어느 봄날 밤 거룩한 가난의 이상을 포옹하기 위하여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였으며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을 찾았다.

 

동생 아녜스를 만나다.

클라라는 자신의 신비적인 영적 체험을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동생 아녜스와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5세의 아름다운 소녀인 아녜스 역시 초자연적 신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클라라가 도망친 이후 가족들은 아녜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언니 클라라는 동생 아녜스에게 비밀을 전해주었다. “아녜스, 이것만은 명심하여라, 주님의 집에서 단 하루를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천 년을 사는 것보다 더욱 소중하단다. 아름다움과 젊음도 마치 바람결에 연기처럼 사라지듯이, 인생도 언젠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란다. 나의 동생, 만약 네가 주님의 감미로운 사랑을 맛볼 수만 있다면! 이 사랑은 언제나 젊고 영원하며 아무도 우리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단다.”

 

아녜스도 집에서 도망치다.

클라라의 확신에 찬 말고 모범은 아녜스로 하여금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집을 도망치도록 하였다. 아네스는 성 안젤로 수도원에 사는 언니에게로 도망쳤다.

예상했던 대로 가족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녜스가 도망친 것을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장정들을 모아 모날도의 지휘 하에 미친 듯이 성 안젤로 수도원으로 갔다. 그들은 그 어린 소녀를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데려오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17) 클라라와 거기 사는 수녀들의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쳐들어와서 울며불며 도움을 요청하는 아녜스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기적적인 개입

그들은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아녜스를 산비탈로 질질 끌고 갔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멈춰섰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연약한 어린 소녀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무거워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노력으로도 아녜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화가 잔뜩 난 삼촌 모날도는 아녜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주먹으로 내리치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팔은 허공에 떠 있는 채로 굳어버렸다.18)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아녜스를 홀로 남겨두고 도망쳐버렸다. 잠시 후 언니가 달려왔다. 아녜스는 클라라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반면 감동을 받은 클라라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19)

 

드디어 머무를 곳을 찾다

프란치스코는 이 사건을 알게 되자마자, 성 안젤로 수도원으로 갔다. 그리고 아녜스의 용기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머리수건과 수도복을 입혀주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아녜스를 불러놓고는 말했다. “나는 자매들에게 드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귀도 주교님께서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드디어 여러분을 위한 거처가 마련되었습니다. 그곳은 지극히 가난한 곳이기에 자매들이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명으로 그 성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여러분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벌써 자매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성 다미아노 성당입니다. 이제 그곳을 가난부인의 성지라고 부를 것입니다.”20)

프란치스코의 말은 마치 발삼 향유처럼 클라라와 아녜스의 영혼 속으로 녹아들었다. 두 자매는 주님께 감사드린 후, 지체 없이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거처를 옮겼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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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성 안젤로 수도원은 수바시오 산 경사진 동쪽에 있다. 그곳에는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거주하였다. 그 수녀들은 1238년 성녀 클라라 회칙을 따라 살았다(폴르티니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에 관한 소식>). 

17) 당시의 귀족 가문에서는 딸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딸을 결혼시키지 못하여 체면이 손상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답고 인기 있는 소녀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거나 동맹을 맺는 데 필요한 하나의 미끼로 간주되었다. 그 당시의 귀족들은 민중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부유한 계층의 특권을 파괴하려는 하층민을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18) 모날도의 분노는 주로 지나친 책임의식에 의한 것이었다. 형인 파바로네가 죽은 후 그는 조차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아녜스는 당시 15살밖에 안되었으므로 아직까지 부권에 속해 있었고, 게다가 정식으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몸이 아니었을 때였다. 그녀의 머리를 잘라 주고 수도회로 받아들인 사람은 프란치스코였다(토마스 첼라노가 쓴<성녀 클라라의 전기> 24-26>. 

19) 아녜스의 도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리카르도 바첼 리가 쓴 <더 이상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습니다>라는 책에 서술되어있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다음 책도 참고할 수 있다. 나자레노 파브레티<클라라>: 키아라 아우구스타 라이나티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20)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면서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을 생각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다. 이때는 1206년경이며 그에게 아직 형제들이 없었을 때이고, 그들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때이다. 이 내용은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제2생애>와 <세 동료 전기>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21) 성 다미아노 성당은 수바시오 산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소유인데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을 위해 포르치운쿨라를 얻은 것처럼, 자매들을 위해서는 성 다미아노를 얻었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그 시기에 성 다미아노는 아시시 주교의 소유였고, 그 주교는 후에 성 다미아노를 클라라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남겨 주었다(데오도시오 롬바르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브라칼로니 <성 다이아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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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부인의 성지

성 다미아노에서 클라라는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거의 무너져가는 담을 넘으면서, 클라라는 비로소 하느님께서 오래 전에 자신을 인도하신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회칠이 다 벗겨진 성당 벽과 작은 가대의 거친 가대석과 춥고 황량한 침실로 통하는 급경사진 비좁은 계단 등, 이 모든 것들이 가난을 말해주었다. 가난 부인의 진정한 요새인 이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진정으로 가난한 수도원이었다.22)

 

최초의 수련 자매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에게 다른 여인들도 그녀의 이상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미리 말해두었다. 아녜스 다음으로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 온 사람은 클라라가 집에서 도망쳐 나오던 날 밤 그녀를 도와주었던 구엘푸치오의 파치피카였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페루지아의 벤베누타가 따라왔다. 이어서 오프레두치오의 발비나, 괄티에로의 체칠리아, 안젤레이오의 안첼루치아, 지슬레리오의 필립파, 메세르 카피타노의 프란치스카, 마르티노의 아마타를 비롯한 많은 동정녀들이 그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클라라의 막내 여동생인 베아트리체와 어머니 오르톨라나가 함께 하였다.23)

이로써 성 다이마노에서 프란치스코 2회인 여자 수도회가 탄생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수도회를 ‘가난한 부인들의 회’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24)

 

평화의 오아시스

짧은 시간 안에 성 다미아노 공동체는 진정한 평화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그곳은 화기애애함으로 가득했다. 황폐하기 그지없던 방과 집기들이 오히려 고요함과 환희를 전해주고 있었다.

성 다미아노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열악한 환경, 불편한 잠자리와 추위, 배고픔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자매들은 가난하다고 느낄수록 더욱 기뻐하였다.

클라라에게는 수도원의 구석구석이 따뜻함과 화기애애함으로 가득한 천구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끊임없는 환희와 축제로 초대하는 곳이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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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란치스코는 최선을 다해서 성당을 수리했다. 하지만 수도원은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었다. 그곳에는 가난 외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23) 성 다미아노 성당의 가대에는 아직도 그 당시 몇 자매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양피지 사본문서가 보관되고 있다. 파치피카, 크리스티나, 아녜스, 필립파, 벤베누타, 프란체스카, 발바나, 지오바나, 펠리치타 등이다. 이 이름들은 그들의 정신이 영원히 존재함을 증명해 준다. 아마 수도원의 이 부분이 프란치스칸 가난의 메아리를 가장 잘 전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다른 이름들은 그 당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야고바, 일루미나타, 만수에타, 콘솔라타, 펠리치타, 벤나타, 클라레타, 다니엘라, 스텔라, 파트리치아, 벤베누타, 키아렐라, 안젤루치아 등이다. 이 부드러운 이름들에는 이탈리아 민족의 선함이 섬세한 부드러움과 함께 담겨져 있다. 

24) 프란치스코는 이 명칭을 매우 소중히 여겼고 자매들을 ‘가난한 부인들’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이것은 단지 여성의 인격에 대한 존중 때문만이 아니라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 역시 마치 ‘원탁의 기사’처럼 이러한 기사도 아래에서 행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녀의 모든 글에서 부인이라는 단어 대신에 자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곧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라고 지칭한다. 클라라에게 있어서 이 명칭은 수도회의 근본적인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안에서의 일치와 지극히 높은 가난이다. 

25) 클라라는 더욱 겸손하게 봉사하기를 원하였다. 그녀는 종종 아픈 자매들을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샌 다음날 아침에도 다른 자매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쓸고 닦고 아침을 준비하고 병자들을 돌보았다. 병자들을 위해 그녀는 수고와 밤샘 등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부족할 때는 성호를 긋곤 하였는데 이것이 자주 기적처럼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디암브라 마돈나의 벤베누타 수녀와 그녀의 조카 마르티노의 아마타 수녀, 그리고 크리스티나 수녀, 발비나 수녀, 체칠리아 수녀와 그 외의 다른 여러 명을 낫게 하였다. 클라라는 수도복 안에다 피부에 딱 달라붙는 고행복을 입고 다녔다. 그것은 아마포와 말총으로 꼬아 만든 긴 천으로 만들어졌다. 이 고행복은 오늘도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수녀원 본원에 성녀의 다른 유물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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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들

그들은 아무것도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빌린 것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았다.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그들은 일 년 내내 단식하기로 했기 때문에 음식은 아주 간소하고 소박하였다.26) 그들의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에 불과했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다.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하였으며, 잠자리는 긴 벽을 따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황량하고 커다란 하나의 누추한 방이었다.27)

 

수도원 밖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도록 형제들을 보낸 것처럼, 클라라도 역시 자매들을 병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곁으로 보내 그들을 돌보게 하였다. 자매들은 어떠한 보답이나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일했다. 그래서 그들은 ‘봉사하는 자매들’이라고 불리웠다.

클라라는 회칙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수도원 밖에서 봉사하는 자매들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표양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정숙하게 행동하며 말을 적게 할 것입니다.”28)

클라라의 불타오르는 선교의 열정은 한계가 없었다. 5명의 작은 형제들, 베라르도, 베드로, 아쿠르시오, 아듀토, 오토 - 의 첫 순교 소식을 접하였을 때 클라라는 순교의 열망에 불타올랐다.29)

 

외부에서 봉사하는 자매들의 발을 씻어주다

외부에서 봉사하는 자매들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때 쯤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자매들은 피로에 지치고 먼지에 뒤덮인 채로, 꽃이나 풀들을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클라라는 자매들을 맞아하고 그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특권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원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작은 대야에 물을 담아 자매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발등의 물기를 닦은 다음에는 종종 갈라지고 부어오른 발에 입을 맞추며 자매들의 선해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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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클라라 회칙> 3,6-9 참조 일요일과 성탄절에만 하루에 두 끼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기를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빵과 채소를 먹었다. 애긍으로 받은 계란과 우유가 있을 때 병자들은 그것을 먹을 수 있었다. 클라라의 단식은 더욱 엄격했다. 시성조사 증언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주일에 3일 즉 월요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는 성 프란치스코께서 어떤 식으로든 매일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명했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시성조사 증언록> 2,8) 

27) 클라라가 오랫동안 일하며 병고를 참고 누워 있던 공동 침실의 한 켠에는 현제 꽃병과 십자가가 놓여져 있어 방문객들에게 클라라의 침실임을 알려준다. 

28) 시성 조사 증언록에 매우 설득력 있는 증언이 남아있다. ‘지극히 거룩한 어머니께서는 봉사하는 수녀들을 수도원 밖으로 보낼 때 ···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을 보게 될 때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것 안에서 늘 하느님께 찬미 드리도록 하라고 주의시켰다.“(<클라라 회칙> 9,6-7; <시성 조사 증언록> 14,9). 수도원 밖에서의 일들은 엄격한 봉쇄 제도가 실시되었을 때에 중지 되었다(몬토르시의 <아시시의 클라라>; 엑스페레의 <성녀 클라라의 정신>), 사바티에가 말하기를, 클라라 수도회는 초기에는 관상 수도회가 아니라, 진료소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수녀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한다(<완덕의 거울>). 그는 비트리의 야고보의 증언을 기초로 하였다. 그렇지만 올리게르가 분명히 증명한 것에 의하면 그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클라라회 회칙 기원>). 

29) 발비나 자매는 시성조사 증언록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클라라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신앙과 수도회의 옹호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기를 원하였다.”(<시성조사 증언록>7,2) 

30) 프란치스칸 원전에 의하면 어느 날 외부에서 봉사하는 한 자매가 부끄러움으로 성녀의 입맞춤을 피해 자신의 발을 확 빼버렸다. 그녀는 실수로 클라라의 입을 발로 차게 되었고, 클라라의 입술에서 한 줄기의 침과 피가 흘러나왔다. 그 아픔으로 인해 클라라는 눈물이 났다. 그 자매는 당황한 채 용서를 빌駭쨉? 클라라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중에도 그 자매에게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발을 잡고 어루만지며 입 맞추었다(<시성조사 증언록>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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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의 우선적 선택

클라라는 자신이 가장 가난한 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될 정도였다. 프란치스코는 자발적으로 가난과 혼인을 했다. 클라라 역시 프란치스코처럼 가난 그 자체이기를 원했다.

클라라의 가난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가난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클라라는 절대적인 가난 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위대하시고 가난한 분이시며,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던 것이다.31)

 

세라핌적 열정

가난한 부인들의 식당에서 물질적인 빵은 부족해도 괜찮았지만, 영적인 빵인 성체가 부족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하는 사도직을 기도로써 지원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자매들은 밤낮으로 제대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감실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중심이 되었다.

이 수도원에서 성체성사에 관련된 비품들은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클라라는 자수를 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매들을 동원하여 가난한 교회를 위한 전례용 비품들을 만들었다. 이 점에서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합당한 딸이었다.32)

 

프란치스코의 조언자

프란치스코는 회개생활을 시작한 초기부터 관상적 삶과 활동적 삶에 대한 열정 사이에서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였다. 그는 고뇌에 차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의 길인가?’

프란치스코는 이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클라라의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클라라라면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프란치스코는 맛세오 형제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클라라 자매에게 가서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곧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도만을 해야 하는지를 주님께서 밝혀주시기를 기도해 달라고 전해주시오!”

맛세오 형제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가서 프란치스코의 말을 전했다. 클라라는 이전에 성 프란치스코에게 말씀하셨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였다.

며칠 후 맛세오 형제는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다시 찾아갔다. 클라라의 대답은 확실했다. “사부님께 말씀드리세요, 주님은 사부님께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은둔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답니다.

 

순명으로 원장직을 맡다.

자매들이 수도생활을 시작한지 3년 후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공동체에 구조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원장 임명을 생각했다. 당연히 새 수도회의 맏딸인 클라라가 원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거절했다. “안됩니다, 프란치스코 저는 세상의 명예와 허영에서부터 도망쳤습니다. 나의 자매들을 통솔하는 일을 맡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봉사하고 순종하고 싶을 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에게 대답했다. “좋아요! 자매의 말대로 만약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자매에게 그것을 순종으로 부탁합니다.”33)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다.

클라라는 원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자신들을 지도해 줄 확실한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가난의 길을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프란치스코와 자주 만나기를 원했었는지도 모른다.34)

하지만 빈자는 자주 아시시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그리고 괜한 소문을 만들지 않으려고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자주 찾아가는 것을 피했다. 그는 형제들에게도 자매들과 너무 친밀하게 지내지 말 것과 그 수도원에 가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해 자신이 모범이 되고자 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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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반론의 여지없이 확증할 수 있는 것은 프란치스코 다음으로 어느 누구도 성녀 클라라만큼 가난의 가치를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클라라의 가난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에 근거를 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의 약속으로 굳세어졌으며,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흘러나왔다. 

32) 요르겐센은 <순례자의 책>에서 클라라가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세라핌적 열망으로 가득 찼다고 서술했다. 그는 아마 아시시 대성당 중앙 제단의 양쪽에 놓인 두 개의 성상을 보며 이 글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 클라라 성상은 성합을 가슴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덴마크 출신 작가에게 질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성 프란치스코는 무엇에 몰두하였는가? 프란치스코는 세라핌적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33) 클라라는 원장직을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결코 자신을 위해 그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늘 ‘여종’ 또는 ‘하녀’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 이 표현들은 그녀의 직무가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며 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매들은 클라라가 자신들의 발을 닦아주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자매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위로해주며, 한밤중에 일어나 추위를 막아주기 위해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들이 주님을 찬미할 준비를 하도록 직접 종을 쳐주며, 사라센들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공포에 싸여 있을 때 구해 주었던 일들을 보게 되었다. 또한 클라라가 동료 자매들을 위해 베푼 많은 기적은 그의 자매애적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게 한다. 

34) 성녀 클라라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둥이며, 하느님 다음의 유일한 위한이 되시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클라라는 작은 형제회가 자기 수도회를 지탱해 주기를 바랐고, 회칙에서 가능한 한 작은 형제들의 회칙 내용을 반영하려 했다.

35) 작은형제회의 인준받은 회칙 11장 참조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보호자 추기경 우골리노와 합의하여 우골리노 추기경을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 보호자’로 에지디오 형제는 영적 보조자로, 벤티벤가 형제는 애긍을 청하는 사람으로 임명했다. 이 외에도 가난한 자매들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여러 형제들이 있었다. 설교를 잘해서 클라라가 매우 좋아했던 아트리의 필립보 형제, 아마토 형제와 보나구라 형제, 죽음에 임박한 성녀 클라라에게 성체를 모서다 주었던 무명의 관구장, 그리고 그녀의 임종을 지켜주었던 안젤로, 주니페로 그리고 레오 형제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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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중개 역할

형제들은 클라라에 대한 동정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말하였다. “사부님, 저희가 보기에는 사부님의 이러한 방법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는 행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클라라는 사부님의 영적 정원의 작은 나무로서 도움을 받을 만합니다. 클라라가 그토록 기다리는 사부님의 위로 말씀을 거절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동료들의 충고를 바라고 있던 프란치스코가 물었다. “형제들도 그렇게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내가 클라라의 부탁을 들어주어도 되겠습니까?” 동료들이 대답하였다. “네, 사부님, 클라라는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습니다. 사부님이 그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지 않는다면 잘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즉시 대답했다. “자, 그러며 가서 자매를 이곳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초대하십시오. 클라라도 잠시 수도원을 떠나 여기로 오는 것을 좋아할 겁니다. 우리는 숲 속에서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식사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방문하도록 합시다.”

 

숲속에서의 식사

클라라는 드디어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몇몇 자매들과 동행하였다. 클라라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의 작은 성당으로 들어가 제단 앞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숲으로 갔다. 그들은 물 주전자와 몇 개의 빵이 올려져 있는 바위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음식을 먹기 전에 프란치스코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클라라가 어떤 굶주림이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해,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주님께 대한 충실성으로 이애 되어야 할 가난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클라라는 그의 이야기를 넋을 놓고 듣고 있었다. 그녀는 대성당의 설교와 출가와 서약예식을 되새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프란치스코의 말은 단시간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 한 줄기의 밝은 빛이 모든 것을 에워쌌다. 포르치운쿨라 전체가 빛으로 덮혔다. 아시시에서 보기에는 마치 숲 전체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불이 났다고 걱정하며 불을 끄기 위해 모여들었다. 하지만 숲에 들어가자 놀랍게도 그곳에서 클라라와 프란치스코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찬란한 빛의 물결 속에 휩싸여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불빛은 점점 약해지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그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러나 기쁨으로 충만하여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시편 50편 (Miserere)

프란치스코는 클라라가 먹을 음식은 없어도 지낼 수 있지만, 영적인 음식이 없으면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클라라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성 다미아노로 갔다. 그의 방문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가 영적 생활에 대해 좋은 권고를 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르치운꿀라의 숲에서 일어났던 영적 불이 다시 다미아노의 올리브나무 숲에서도 일어나기를 희망하였다.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의 주위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하늘로부터의 영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영감이 내려왔다.

프란치스코는 한 줌의 재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자기 둘레에 원 모양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편 50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깊은 감동을 받은 자매들은 침묵 속에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시편이 끝나자 프란치스코는 일어나 모자를 쓰고 양손을 소매에 놓은 채 조용히 수도원 밖으로 나갔다.

 

하느님께서 섭리로 자매들을 도와주시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 자매들의 수효가 늘어감에 따라 어려움도 점점 많아졌다. 게다가 거지들과 떠돌이 나병환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 수도원으로 몰려들곤 하였다.36)

가난한 자매들은 그들을 사랑스러운 친구로 여겼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러한 용감한 행위를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이 일은 프란치스코가 보낸 애긍을 청하는 형제들과 아시시의 은인들이 보내준 자선을 통해 이루어 졌다.37) 동시에 하느님은 기적을 통해서도 그들을 돌봐 주었다. 그 중 몇 가지 기적들을 소개하여 보겠다.

 

기름의 기적

어느 날 수도원에는 병자들에게 줄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간의 기름조차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클라라는 애긍을 청하는 형제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클라라는 기름을 채워다 주기를 바라면서 단지를 닦아 문 옆의 담 아래에 놓았다. 잠시 후 벤티벤가 형제가 기름 단지를 가지러 왔다.

하지만 그가 단지를 손에 든 순간, 이미 그 단지가 향기롭게 신선한 기름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놀라움으로 기름 단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헛수고에 대해 불평하며 돌아갔다.

 

빵을 많게 하다

하루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식사 담당 자매가 식사 종을 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클라라는 왜 식사가 늦어지는지 물어 보았다. 그 자매는 “집안에는 오직 빵 한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오늘 저녁에도 단식을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클라라가 그에게 말했다. “나의 딸인 자매여, 두려워하지 말아요, 가서 그 빵을 가져오세요. 그리고 우리의 숫자에 맞게 50등분 하세요. 그리고 나서 저녁식사를 하라고 자매들을 부르세요.”하자 “그것은 불가능해요.” 식사 담당 자매가 대답했다. “그래도 가서 내 말대로 하세요.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자매가 빵을 자르는 동안 클라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빵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빵은 모든 자매들의 허기를 채우고도 남아서 애긍 청하는 형제들에게까지 나눠 줄 정도가 되었다.

 

빵과 은빛 송어

클라라는 특히 병든 자매들을 세심한 배려와 인자함으로 돌보아 주었다. 하루는 몹시 앓고 있?젊은 자매가 클라라에게 스펠로의 건포도 넣은 빵과 테시오의 송어를 먹고 싶다고 했다. 클라라는 그 자매에게 그것을 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기쁘게 약속했다. 그리고는 즉시 애긍 청하는 형제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는 마침 부재중이었다.

클라라는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낯선 젊은이가 수도원을 찾아와 건포도를 넣은 빵과 은빛 송어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전해주었다. 클라라는 병든 자매와 함께 그 음식들을 먹었다. 클라라에게 사랑은 단식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역시 어떤 형제가 허기졌을 때 똑같이 하였다.38)

 

단 하나의 이상

이제 클라라의 운명은 프란치스코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복된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소개하였다.39)

주님께서는 그들이 서로 보완적인 차원, 곧 프란치스코는 활동적 차원에서, 클라라는 관상적 차원에서 똑같은 체험을 함께 하며 살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모든 여정과 사도적 활동에 기도로써 함께 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 대화를 지속하면서 군중에게 설교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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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 당시 아시시는 매우 빈곤하고 비참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부유한 가문들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던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곤 했었다. 가난한 자매들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스러운 친구들로 여겼다(마라아스티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냐시오 라라냐가 <아시시의 우리의 형제>; 지오르지오 후드린<프란치스코, 클라라, 그리고 그 외의 인물들>). 

37) 성녀 클라라의 회칙에는 가난한 자매들을 위해 정신적인 도움과 물질적인 도움(애긍을 청하는 일)을 주는 작은 형제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클라라 회칙 12, 5-7). 수도회 초기부터 작은 형제들은 성 다미아노와 파도바의 아르첼라, 로마의 코시마토 수녀원 옆의 작은 숙소에서 살았다. 

38) 페루지아 전기 1 참조

39) 성 보나벤투라가 서술하기를 “하느님의 지극히 사랑하는 동정녀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자라난 최초의 작은 나무였으며, 봄의 향기로운 꽃처럼 그녀의 향기를 널리 퍼뜨렸고, 강렬한 별처럼 빛을 비추었다.”(대전기 4,6)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자매들의 참된 창설자라고 끊임없이 말했다(클라라 회칙 서문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교서; 클라라 회칙 1; 클라라 유언 참조). 클라라는 자기 공동체를 성 프란치스코의 밭, 그리고 자신을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말하고 있다(클라라 회칙 1,2; 클라라 유언 11 참조). 

40) 클라라와 프란치스코의 공통적인 이상은 첼라노에 의해 강조되었다. “유일하고 같은 정신이 형제들과 그 가난한 자매들을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나오게 하였다.” 이것을 비트리의 야고보는 1216년에 쓴 편지에서 확언한다. “나는 그 지역에서 나에게 큰 위안을 주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부자들과 평신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가진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세상마저도 떠난다. 이들이 ‘작은 형제들과 작은 자매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들은 교황과 추기경들의 인정을 받는다.” 인노첸시오 4세는 이 두 수도회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는 하나로 통합하려는 뜻을 밝혔으나 총장 크레센시오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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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곁에서

클라라는 다미아노 수도원에 있었지만 매일 매순간마다 프란치스코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가난한 자매들을 도와주던 절친한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프란치스코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칸 원전은 클라라와 프란치스코의 따뜻한 인간미와 애정의 조화로움을 노래하는 감미롭고 시적인 글들을 소개한다. 빈자인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에게 영감을 주고 위로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도 힘든 시기가 있을 때면 겸손한 마음으로 마치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아들처럼 그녀에게 의존하곤 하였다. 그 순간들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들이었다.41)

 

라베르나의 십자가

1224년 9월 14일 십자가 현양축일에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에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보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는 라 베르나의 거대한 숲에 숨어서 눈물과 한숨으로 주님께 간청했다. “주님, 주님께서 참혹한 수난 시에 겪으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신에 느끼게 하여 주소서.”

그러자 여섯 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가 빛나는 광채에 휩싸인 채 나타났다. 이 환시가 사라지자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손과 발, 그리고 가슴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오상이었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42)

 

클라라가 프란치스코를 성 다미아노로 초대하다

프란치스코는 아주 심하게 아팠다. 죽음 자매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지만 라 베르나에 몇 주간 더 머물렀다.

가슴의 상처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눈병은 마치 눈을 불로 지지는 듯 아프게 했고, 위의 통증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그는 아시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클라라의 애정 어린 강요를 받아들여 성 다미어노 수도원으로 갔다. 클라라는 헌신적이고 강인한 믿음과 애정의 소유자였기에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삶에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천국의 한 모퉁이

클라라는 기쁨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으로 프란치스코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정원에 갈대로 오두막을 짓게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잠자리로 밀짚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매들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날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처로 인한 아픔과 고통으로 평정을 찾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거기다 굶주린 쥐들이 그의 얼굴까지 타고 올라왔다. 이와 같은 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

 

피조물의 찬가

바로 이곳, ‘천국의 한 모퉁이’에서 가장 외롭고 괴로운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기쁨에 넘쳐 피조물의 찬가를 노래하였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43) 클라라와 자매들은 그 황홀한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 찬가의 마지막 가사는 자매들을 위해 쓰여졌고 자매들은 이것을 지침과 같이 받아들였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그날부터 가난한 자매들은 기쁨 중에 한껏 겸손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꿀라로 돌아가다

자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성당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가 떠나기 전 가난한 자매들은 그의 주위로 모였다. 프란치스코는 자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린 뒤 따뜻한 애정이 담긴 말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동료들은 조심스럽게 들것 위로 프란치스코를 뉘이고 포르치운꿀라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갔을 때 프란치스코는 동료들에게 잠시 멈추고 아시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간신히 팔을 들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주님께서 그대를 축복해 주시기를, 오! 나의 사랑스러운 도시여, 그대의 품안에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으리로다. 그대의 성벽 안에 많은 하느님의 여종들이 살 것이며 하늘나라로 뽑힌 이들이 많을 것이로다.“ 행렬은 다시 계속되었다.

 

가난한 자매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포르치운꿀라에 도착하자 동료들은 프란치스코를 성당 근처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모셨다. 평화의 마을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다시 감미로운 애정으로 가득 찼다. 그는 가난한 자매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빨리 전하고 싶어 아름다운 선율이 담긴 성스러운 어구를 받아쓰게 하였다. 그리고 안젤로 형제와 파치피코 형제에게 성 다미아노에 가서 그 찬미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44) 클라라와 자매들은 그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들으십시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가난한 자매들이여,

여러 나라와 각 자방에서 모여든 자매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순종에 충실하여 죽을 수 있도록 항상 진리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영적 생활이 더 큰 가치를 지니니, 외적생활을 하려하지 마십시오.

큰 사랑으로 부탁하오니.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조심스레 관리하십시오.

병고에 시달리는 자매들과 이들을 돌보느라 애쓰는 자매들은

똑같이 평온한 가운데 인내를 가지십시오.

여러분 하나하나가 동정녀 마리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여왕의 월계관을 받으리니,

여러분의 수고의 대가가 높으리이다.“

 

이 노래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표현한 마지막 감사의 찬미가였다.

 

프란치스코와의 마지막 만남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청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에게 수도원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한 형제에게 성 다미아노로 가보라고 부탁했다.

“가서 클라라오 우리 자매들에게 전하시오. 나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한 모든 고통과 슬픔을 버리시오. 어차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고, 그것은 가난한 자매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날 가까운 곳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시시에서도 관리들과 성직자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장례 행렬을 이루었고, 가난한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향해 떠났다.

수도원 입구에 장례행렬이 멈추자, 자매들은 한 명씩 그 시신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프란치스코의 오상에 입맞추었다.

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자매들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성 다미아노는 전보다 더 가난해졌다. 하지만 그 가난함은 주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중병에 걸리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클라라도 건강이 악화되어 누추한 침대에서 거의 30년간이나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피조물의 찬가) 이 글은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클라라를 위해 남긴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자매들은 그들의 어머니인 클라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아요, 주님께선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클라라는 결코 의욕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영혼이 거룩한 환희로 흘러 넘쳤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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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클라라 수도외의 아시시 모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유물 중에 이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감탄할만한 유물 중 하나는 부제인 프란치스코를 위해 클라라가 수놓았던 제의와 오상을 받은 프란치스코의 발의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독창적으로 만든 실내화이다. 

42) 라 베르나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우거진 험한 산으로 예수님께서 갈바리아 산에서 돌아가실 때 갈라져 나온 산 중의 하나라는 전설이 있다. 이 산은 갈라진 바위로 인해 경사진 한 쪽 끝은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절벽으로 되어있다. 프란치스코는 치우시의 오를란도 백작으로부터 이 산을 기증 받았다. 그는 절벽 맨 위쪽에 작은 오두막을 새로 지었다. 그것은 단식하며 좀 더 자유롭게 하느님과 보다 더 친밀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43) 피조물의 찬가는 어리소녀의 눈동자처럼 신선하고 맑고 깨끗함이 담긴 최초의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시이다. 누구든 이것을 읽으면 프란치스코가 특별한 기쁨의 한 순간에 힘이 넘쳐 이 시를 썼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아주 다르다. 이 시를 쓴 것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불면증에 시달리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뇌와 번민에 싸여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고귀한 영혼에서 나온 경탄할 만한 피조물의 찬미가인 것이다. 이는 ‘성모의 찬가’(Magnificat)처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찬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44) 이 본문은 최근에 발견되었고 키아라 아우구스타 라이나티 수녀가 프란치스칸 원전 안에서 발췌하여 간행하였다. 이 글은 두 개의 사본이 있으며, 베로나 근처 노발리에의 성 피덴치오의 클라라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1300년대 초기에 속하는 양피지로 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1500년대 초기에 속하는 종이로 된 문서이다. 

45) 클라라가 병에 걸려 누워 있었던 침상은 마치 하나의 설교대와도 같이 표양을 통해 자매들에게 인내와 포기를 가르치는 자리가 되었다. 클라라는 자주 탈혼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특히 금요일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심취되었다. 페루지아의 벤베누타 수녀는 시성 중언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머니 성녀 클라라는 밤낮으로 꾸준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페르툴로의 아네스 수녀도 덧붙여 증언하였다. “클라라 어머니는 저녁 끝기도 후 긴 시간 기도에 머물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곤 하였습니다.”(<시성조사 증언록> 2.9‘ 10,3)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고 눈물은 애도의 격정 때문에 마를 줄을 몰랐다.” 클라라의 대단한 기도의 열성 앞에서는 마귀의 힘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마귀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너무 울면 못쓴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너의 뇌가 눈물로 녹아서 코로 흘러나와, 코가 삐뚤어질 것이다.” 이에 그녀가 재빨리 응수하였다. ‘주님을 아는 이는 조금도 삐뚤어지는 일 

이 없습니다.’“(토마스 첼라노<성녀 클라라의 전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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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방문하다

클라라가 병중에 있는 동안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교황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통보를 받은 클라라는 성당을 꽃으로 장식하고 수도원으로 통하는 작은 길에다 올리브 가지를 뿌리도록 하였다.

교황은 사적인 형식으로 방문했다. 먼저 성당에 잠시 머물며 기도를 드린 후, 클라라와 자매들과 함께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미 그들의 생활양식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 엄격함을 확인하기 위해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찾아온 것이다.

 

가난의 특전을 요청하다.

클라라는 교황과의 만남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가난의 특전에 대한 확인과 법적인 인준을 요청하였다.

클라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엄격한 가난 속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단 말이요?” 클라라가 대답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여종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교황이 다시 말했다. “어머니인 교회는 결코 당신의 사랑하는 딸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클라라가 고쳐 말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이 지상에서 그분의 대리자이신 교황 성하일 것입니다.”

 

당황한 그레고리오 교황

그레고리오 교황은 많은 사람들이 특권과 부탁을 요청하는데 비해, 클라라는 어떻게 그러한 가난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는 클라라의 단호한 표정이 서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딸이여, 만약 당신이 걱정하는 것이 이미 나에게 약속한 가난 서약 때문이라면, 내가 그것을 풀어 주겠소.“

그 말을 들은 클라라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클라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간청했다. “교황님, 저는 제가 한 서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죄를 용서받고 싶은 것뿐입니다. 가룩한 가난의 특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46)

 

빵 위에 십자가

교황은 예정보다 오랫동안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 머물렀다.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 저녁이 되었고, 자매들은 교황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클라라는 약간 당혹스러웠지만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동냥으로 얻은 딱딱한 빵과 물 밖에는 드릴 것이 없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자매들은 교황께 식사 강복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 임무를 클라라에게 맡겼다. “클라라, 나는 당신이 십자 성호로써 이 빵에 강복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존경하올 교황님” 클라라가 말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이러한 영예를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했다. “나는 자매에게 거룩한 순명으로 명하는 것입니다.” 클라라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당황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십자가를 그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 여종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갑자기 모든 빵의 딱딱한 껍질 위에 십자가가 새겨졌던 것이다.

 

클라라의 실망

그레고리오 교황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 방문은 클라라에게 커다란 실망을 주었다. 클라라는 지상에서의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자신의 생활양식을 인정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했다. 지극히 높은 거룩한 가난의 문제는 클라라에게 너무 지나친 모험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오직 이 커다란 위안을 얻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맞지 않기를 바라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있던 가난한 여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가난의 특전에 대한 승인과 법적인 인준을 요청했다.

 

성 다미아노로부터 사라센들을 쫓아내다

1241년 여름 아시시는 페데리코 2세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성문을 안으로 잠그고 성벽 안에 숨어있었다. 가난한 자매들만이 성 밖에 남아 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클라라는 주님께 온전히 신뢰하며 자매들을 불러놓고 안심시켰다. “자매들이여,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딸들이여,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날 사라센 아베르사의 비탈레가 이끄는 군인들이 수도원의 담을 사다리로 넘으려고 하였다. 클라라는 동료 자매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침상에서 일어나 성광을 높이 들고 성당 마당 위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탄원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당신의 이 가난한 여종들을 보호해 주소서.” 그러자 어린 아이의 목소리 같은 음성이 들여왔다. “내가 너희를 항상 보호해주리라.” 사라센 군인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다음 날 아침 군인들은 아시시에 대한 포위를 풀고 떠나버렸다.47)

 

침대에서 성탄 미사에 참례하다.

성탄전야 자정미사를 드리기 위해 수녀들은 모두 교회로 내려갔다. 매우 쇠약해진 클라라는 어둡고 싸늘한 침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텅 빈 공동 침실 초라한 침대에 누워 클라라는 그 거룩한 미사 전례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태어나시는데, 오 나의 주님, 저는 당신 곁에서 이렇게 멀리 홀로 남아 있습니다.”48)

순간, 갑자기 성당에서 들려오는 성가와 성무일도의 시편 낭송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와 수녀들, 형제들,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모든 전례의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성당 안에 마련된 마굿간 모형까지 ··· 그 모든 것을 클라라는 놀라운 기쁨으로 보고 들었다. 마침내 클라라는 탈혼 상태에 이르렀다.49)

 

텔레비전의 수호자

성탄미사 전례가 끝난 후 자매들이 침실로 올라왔을 때, 클라라는 황홀경으로부터 깨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매들이여,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분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자매들의 찬미소리를 들었고, 미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성모님과 성 요셉이 함께 있는 마굿간도 보았고, 예수님 탄생에도 함께 하였습니다. 이 비천한 당신의 종을 기억해주신 주님께 나와 함께 감사드리며 찬양 드립시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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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클라라는 가난 안에 남아 있기 위한 투쟁을 해야만 했다. 교회 역사에서 클라라와 같은 강인한 여인은 흔치 않다. 그녀는 영혼의 원의를 실행하는데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권력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그녀의 매력적인 힘을 만났다. 단테는 신곡에서 클라라에 대해 말한다. “덕이 온전하고 공로가 높으신 클라라가 천국에 들어가셨다.”(신곡 - 낙원 편 3장) 

47) 아시시에서는 매년 6월 22일 이 해방을 기억하는 기념축제일을 지내고 있다. 프란치스칸 원전들은 아시시 해방에서 클라라의 결정적인 중개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48) 성탄절은 성녀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축일 중의 대축일이고, 기쁨 중의 기쁨이었다. 클라라는 이 날만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배부르게 해 주기를 갈망했다. 또한 가축을 기르는 농장 주인들이 그들의 가축들에게, 특히 황소나 당나귀에게 더 많은 먹이를 제공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날은 많은 곡식들이 길가에 흩뿌려져 새들이 날아와 충분히 먹을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하였다(2첼라노 199-200참조). 

49) 사제가 “미사가 끝났습니다. 가서 평화를 나누십시오.”하고 말하자, 그 환시는 사라지고 벽은 다시 어두워졌다. 

50) 교황 비오 12세는 이 사실을 교려하여 1958년 2월 14일 소칙서로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주보로 정하고, 그를 특별히 현대적 성격을 지닌 ‘새 여성’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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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칙서를 간절히 기다리다.

병으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클라라는 이 지상에서의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부터 가난의 생활양식을 인준하는 칙서를 간절히 기다렸다. 클라라는 자신의 뜻이 거룩한 어머니 교회의 뜻으로 대치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51) 그때까지만 해도 클라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특전과 소유권을 거부했고 회칙의 내용에 대한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이제 클라라는 그 누구도 동정심의 무기로 가난 부인의 요새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공식적인 문서를 자매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었다.52)

 

클라라의 유언

클라라는 자매들에게 적어도 단 한 줄이라도 자신의 이상을 기록한 글을 남기고 싶다는 열망에서 유언을 남기기로 했다.53)

건강이 몹시 악화된 클라라는 동료 자매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누추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짧고 간결한 말로써 자신의 유언을 받아쓰도록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당한 여종이며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나 클라라는 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매들에게 이글을 남겨 둡니다.” 그리고 이 글을 큰 축복으로 끝맺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이나 죽은 뒤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 자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54)

 

프란치스코 동료들의 동반

클라라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프란치스코의 오랜 동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어린 양 레오 형제와 그리스도의 용사 안젤로 형제, 인내심 많은 주니페로 형제, 그리고 원탁의 기사 에지디오 형제’ 등이다.

형제들이 도착했을 때 클라라는 교황의 인준 칙서를 가지고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빈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클라라는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감미로운 예수님으로부터 저에게 들려주시는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클라라는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불을 지피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클라라는 항상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회칙 승인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다, 클라라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 교황 칙서가 도착하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교황 칙서가 도착하다

이 희망은 클라라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1253년 8월 10일 아침 라이문도 추기경은 대망의 교황 칙서를 가지고 성 다미아노 수도원을 찾아왔다.55)

클라라는 기쁨에 가득 차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너무 병약해서 봉인을 뜯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클라라는 두루마리에 입을 맞추고는 그 문서를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문서 내용을 더 잘 듣기 위해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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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지금까지 클라라와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에게서 받은 생활양식이라는 삶의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규범은 1215년에 교항 인노첸시오 3세에게 확인을 받았으며, 1228년에는 그레고리오 9세의 재확인을 받았다. 클라라는 이제 교항의 직인과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새겨진 칙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교황은 이미 성 다미아노를 방문했던 인노첸시오 4세였다. 때문에 클라라는 더욱더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52) 이 문서는 ‘회칙 인준’에 대한 칙서이다. 그 내용은 클라라와 그의 딸들이 그 누구에게서든 재물이나 소유물을 받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그들이 가난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허락하고 회칙의 완화를 막아놓는 수단이었다. 

53) 클라라는 1247년에 자신의 유언을 썼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회칙과 이 글에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는 해석을 덧붙이지 말라”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의 사상이 일부 형제들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로 직후이다. 클라라는 이제 생의 마지막이 온 것을 알고 유언을 기록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누구라도 “클라라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여지가 없도록 매우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클라라의 유언은 프란치스코에게 바치는 진정한 찬미가인 동시에 또한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충실한 작은 나무임을 말하는 확실한 증언이기도 하다. 클라라의 글들 중에서 유언은 가장 뛰어난 자서전인 동시에, 개인적인 기억들과 프란치스칸적인 기억들이 가장 잘 함축된 글이기도 하다. 유언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메시나에 보관되어 있다. 

54) 클라라의 축복문은 프란치스코의 축복문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이 글은 죽어가는 클라라가 가난한 자매들에게 남기는 축복의 말씀을 담고 있다. 어떤 자매가 클라라의 뜻에 따라 이 축복문을 받아쓰고 필사해서 멀리 있는 자매들이나 미래에 들어올 자매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55) 세니의 백작 라이문도는 당시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였으며 작은 형제회의 보호자 추기경이기도 했다. 그는 1254년 12월 12일 알렉산델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56)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 인노첸시오 주교는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딸들인 클라라 원장과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모든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축복을 내립니다. 여러분들은 복된 프란치스코가 남겨 주시고 또한 여러분이 자원하여 받아들인 생활양식, 곧 서로 함께 정신의 일치 속에 그리고 지극히 높은 가난의 서약에 따라 살아야 하는 생활양식을 사도적 권한으로 확인해 줄 것을 우리에게 겸손되이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들의 경건한 간청을 기꺼이 승낙하여 그것을 사도적 권한으로 확인하여 이 칙서로써 인준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가 확인하는 이 기록을 깨뜨리거나 이에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하심을 당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시시에서, 교황 즉위 제11년(1253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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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하며 죽음을 맞이하다

교황 칙서의 내용을 들은 후, 클라라는 눈을 뜨고 그 문서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교황의 직인과 서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상을 바라보며 빛나는 커다란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십자형으로 두 팔을 모아 그 칙서를 가슴에 꼭 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57)

 

아네스의 눈물

클라라 곁에는 동생 아네스가 있었다. 클라라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동생 아네스의 도움을 받기 위해 토스카나의 몬티첼리 수도원 원장으로 있는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아네스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클라라는 그 침묵 속의 눈물을 알아 차렸다. 아네스는 언니에게 말했다. “클라라, 나를 남겨두고 가지 말아요.”클라라는 동생에게 대답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동생, 주님께서 내가 떠나기를 바라신단다. 울지마라, 나는 너를 홀로 버려두지 않아, 우리 곧 천국에서 만날 것야.”58)

 

한 무리의 동정녀들

클라라는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자매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자기와 함께 기뻐해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방안이 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빛 왕관을 쓴 한 무리의 동정녀들이 들어왔다. 그들 중에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해 보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동정녀들은 클라라의 침대 가까이 모여들었고 가장 위대해 보이는 한 여인이 몸음 굽혀 부드럽게 클라라를 안았다. 그리고 매우 가볍고 투명한 천으로 클라라의 몸을 덮은 후 그 행렬은 다시 떠나갔다. 그들은 조용히 멀어져 갔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59)

 

자매 죽음

이제 죽음에 임박한 클라라는 교황 칙서를 가슴에 꼭 품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자매들에게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그분이 보이는 것처럼 자매들도 저 영광의 임금님이 보이십니까?” 감동을 받은 가난한 자매들은 복받쳐 오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흐느낌이 자나간 후 짧은 침묵의 순간을 깨뜨리며 클라라는 말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또 이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를 부축하고 있던 자매가 물었다. ‘어머니, 무엇이 보이세요? 아마 주님이시겠지요?“ 클라라가 그 자매에게 대답했다. ”맞아요! 나는 그분이 보여요.“ 그러고 나서 클라라는 머리를 숙인 채 가냘픈 숨을 몰아쉬었다. 그 날은 1253년 8월 11일 석양이 지는 때였다.

 

맺는 말

이 글을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는 클라라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클라라와 프란치스코, 이 두 사람은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상호 보완적인 차원, 곧 한 분은 활동적인 차원에서, 또 한분은 관상적인 차원에서 함께 같은 경험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아시시를 방문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시에서 클라라 수도회 자매들에게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이 두 이름, 이 두 비범한 성인, 이 두 분의 전기들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60)

클라라는 하느님 은총으로 빚어진 최고의 작품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빛 속에서 클라라의 진정한 위대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클라라가 걸었던 길은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은 사랑의 길,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의 길, 그리고 모든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위선에서 벗어난 길이었습니다. 클라라의 기쁨은 주님이 자신을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신다는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자매 죽음 앞에서도 클라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즐거운 감사를 통해 이 땅의 작은 것들로부터 피어나기 시작하고, 천국의 무한함 속에서 영원히 피어날 자신의 기鳧?표현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클라라는 여성으로서 프란치스칸 교향악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따르면서 클라라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완전한 환희의 기쁨을 맛보며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찾은 것입니다.

나도 여러분이 그 비밀을 밝혀내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클라라와 프란치스코가 여러분을 보호해주시고 선한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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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클라라는 마지막까지 회칙 인준에 대한 간청을 포기하지 않았다. 회칙 인준을 자신이 얻어내지 못한다면 자매들이 얻어내

기는 더욱더 힘들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인노첸시오 4세가 그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간청을 수락하였을 때 클라라는 매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감고 영원히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요르겐센 <순례자의 책> 참조). 

58) 아네스는 클라라가 죽은 지 3개월 후 11월 14일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네스도 성녀로 시성되었다. 

59) 이 영광스럽고 위대해 보이는 동정녀는 클라라가 깊은 신앙심으로 섬기던 성모 마리아였을 것이라고 간주된다. 이 장면은 파우스타 카솔리니의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키아라 아우구스타 라이나티의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에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시성 조사 증언록> 11,4 참조 

60) 이 때 교황은 클라라 수도회 자매들을 초대하여 창설자인 어머니 클라라의 탄생 800주년을 장엄하게 거행하라고 하시면서 “이 기념행사를 성대하고 장엄하게 거행할 것”을 재차 당부하였다(1982년 3월 14일 교황청 기관지 참조)

 

 

 

 

 

 

 

출처 : 진주의 세상
글쓴이 : 진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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