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안승관 베드로 신부님 묵상글
<2021.9.1.연중 제22주 수요일 강론>
<루카4,38-44>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물을 이마에 세 번 붓는 행위는 삼 일 밤과 낮을 무덤에 묻혔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끊고 악의 유혹을 끊고 마귀를 끊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만을 믿겠다고 하느님 앞에 서약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로 한 번 죽었지만,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죽음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body의 세포가 매일 죽듯이,
우리의 “영spirit적인 나(마음)”라는 생명 역시 계속 죽고 새로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5) 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몸의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이 걸리듯이,
우리의 과거의 기억이나 생각이나 느낌들이 이미 지나간 것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연연하다가는 영적으로 병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적으로도 병이 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과거의 “영spirit적인 나(마음)”가 죽고, 새로운 “영spirit적인 나(마음)”로 거듭남을 의미하지요.
“사람은 겉 모양을 보지만 주님은 그 속 마음을 본다”(1사무16,7 참조) 고 하셨지요.
‘하늘의 별의 따다 준다’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비록 실행은 안 되지만, 마음 적으로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예수성심께 봉헌될 때 고스란히 공덕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인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마음껏 상상해서 큰 사랑을 하느님께 공덕으로 올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요,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의 나는 내 것이 아닌 것이지요.
하느님의 것이지요.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청원을 하고, 또 거기에 대해 집착을 한다면 얼마나 덧 없는 것일까요?
물론 기도에 대한 답은 주님의 마음에 달려 있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와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정화되고 그리스도화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리는 빗물을 보면서, 모든 빗물 한 줄기 한 줄기에 “주님께 찬미!” 라는 마음을 담아 예수성심께 봉헌하면,
모든 비가 새로운 찬미의 기도가 될 것이고,
주님은 이 모든 마음들을 받아주십니다.
우주 만물을 통해서 마음을 담아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지요.
또한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요.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매 순간 모든 것에 그 사람 안에 예수성심이 계심을 믿고,
순간 순간을 봉헌합니다.
<luke4,38-44>
38 After he left the synagogue, he entered the house of Simon. Simon's mother-in-law was afflicted with a severe fever, and they interceded with him about her.
39 He stood over her,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She got up immediately and waited on them.
40 At sunset, all who had people sick with various diseases brought them to him. He laid his hands on each of them and cured them.
41 And demons also came out from many, shouting, "You are the Son of God." But he rebuked them and did not allow them to speak because they knew that he was the Messiah.
42 At daybreak, Jesus left and went to a deserted place. The crowds went looking for him, and when they came to him, they tried to prevent him from leaving them.
43 But he said to them, "To the other towns also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44 And he was preaching in the synagogues of Ju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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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삶은 곧 앎이다.
공부는 돈보다 값진 희망과 행복을 만든다. 공부는 돈 그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다. 원래 공부는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한 목적이었다.
제자가 스승인 플라톤에게 묻는다.
“올림픽 우승자에게는 상이 주어지는데, 왜 철학자에게는 아무런 상이 없습니까?”
“상이란 모름지기 그 업적보다 가치있는 것일 때 의미가 있을진대, 지혜를 얻는 일보다 가치 있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달리 상을 주겠느냐.”
삶과 앎을 동일시했던 우리 조상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지혜를 얻는 앎과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공부가 입신출세를 위한 도구가 돼 버리고 말았다. 교육이 과열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짧은 기간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발전하며 많은 부를 창출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 바로 공부에 있었으니, 대한민국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공부의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하든 공부는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투자다. 절대 손해 볼 일 없는 ‘저위험 고수익’이 보장된다. 이 투자의 수익은 금전적으로 환산될 수도 있고 명예나 교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가장 값진 수익은 바로 삶의 질이다. 삶이 곧 앎이다. 앎에 힘쓸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39~4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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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성사
249 성품성사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성품성사를 받는 사람은 주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내리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는데, 이 은사는 그에게 거룩한 권한을 부여합니다.[1538]
성품성사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치유하기 위해 거행됩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사제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직책이나 직무를 맡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는 같은 신앙을 지닌 형제자매들을 위한 특별한 능력과 사명을 선사받게 됩니다.->150, 215, 228, 236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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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 이러한 교회 집단들의 하나에 드는 예식을 서품이라고 불렀다. 이 예식은 축성이나 축복 또는 성사의 성격을 지닌 종교적이고 전례적인 행위였다. 오늘날 서품이라는 용어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에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단순하 ㄴ선거나 지명, 위임 또는 임용을 넘어서는 성사적 행위에만 사용된다. 서품은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당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룩한 권한”을(교회 헌장, 10항 참조) 당신 교회를 통해서 행사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서품은 축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90)/
히 교회를 위하여 선별하여 권한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주교의 안수와 축성기도는 이 서품의 가시적 표징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591)/
II.”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2티모1,12)
하느님만을 믿음
->150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해서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귀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므로, 인간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을 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8)/
느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한 믿음을 피조물에 두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다.(예레17,5-6; 시편39,5940,4); 145(146),3-4 참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9)/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215 “당신 말씀 줄거리는 진리니이다. 정의로운 그 결정은 다 영원하시니이다”(시편118[119], 160). “주 하느님, 주님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으십니다”(2사무7,2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실현된다(신명7,9 참조).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말씀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인 신뢰로 모든 일에서 당신 말씀의 진실과 성실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와 성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자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16)/
->228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6,4; 마르12,29). 최상의 존재는 단 한 분이어야 합니다. 곧 다른 동등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19)/
다..........만일 하느님께서 유일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하느님이 아닙니다.”(테르툴리아누스, ‘마르키온 논박’, 1, 3, 5: CCL 1, 444(PL 2, 274)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06)/
->236 교부들은 신학(Theologia)와 경륜(Oikonomia)을 구별해서, 앞의 용어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를, 뒤의 용어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모든 업적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신학은 경륜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러나 반대로 경륜 전체를 밝혀 주는 것은 신학이다. 하느님의 업적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준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는 당신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밝혀 준다. 유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인격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은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한 사람의 인격을(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21)/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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