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5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 위에 내려주시는 사랑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너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2020년 4월 25일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
- 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
성모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에게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때’는 어떠한 때입니까?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전 세계가 마비되고,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방역 국가로 칭송받는 우리 나라를 제외하고 세계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국민들에게 자택대기령을 내렸고, 사람들은 제한된 부자유 속에서 일상의 큰 불편함을 겪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불편함을 넘어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시행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직장 폐쇄, 학교 폐쇄, 사회적 모임 중단, 그리고 종교 활동 제한 등이 단행되면서 남녀노소할 것 없이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이 때’라는 표현을 통해 현재 우리가 어떤 때를 살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시고 난 다음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죽일까봐 무서워 다락방의 문을 꼭 잠가두고 불안과 공포 속에 모여 있었던 제자들과 같은 우리의 모습을 성모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불안한 삶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우리와 온 인류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지금 이 때를 우리의 개인적 회개를 위한 자극제로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우리의 삶을 개선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만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지 체험하고 있는 이 때,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우리의 발길을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리기 위해 이 때를 그 자극제로, 유인책으로 잘 활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 5-7)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하느님께서 나의 현존을 통해 너희 위에 내려주시는 사랑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이제 일정한 조건을 준수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하는 공식적인 성당 미사 봉헌을 시작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 심지어 성모님이 발현하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조차도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가 중단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성모님은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 대한 너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성령께 홀로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홀로’입니까?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외부 활동이 많이 제한되어 있는 관계로 ‘홀로’ 있을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홀로’란 쓸쓸한 마음으로 혼자 있는 외로움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혼자 있는 고독을 의미합니다. 이 고독 속에서 성당, 자신의 방 혹은 조용한 어떤 장소에서 성령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더욱 강하고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손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들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께 위로자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 성령께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굳건하게 해주시도록 간청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 9-13)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실 만큼 크셨던 하느님의 그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인 인간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분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억하시고,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성모님을 통해서 입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보내셨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에 앞서 성모님을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발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모님의 현존은 바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강력한 표지입니다. 따라서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이 참되다고 믿는 우리는 성모님의 사도로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너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아, 시련들로 인해 너희 마음이 굳어지게 하지 말고,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시련들’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대유행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온 세상 사람들이 시련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큰 시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시련들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각종 시련들을 겪고 있는 당신의 어린 자녀들이 그 시련들로 인해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시련들로 인해 마음이 굳어지면 희망도 삶의 의지도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쉽게 원망하거나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들이 찾아오면 기도하는 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시련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기도가 사막처럼 되게 하지 마라.” 고 말씀하십니다. 사막의 이미지는 황량함과 건조함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시련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황량하고 메마른 마음으로 건조한 기도를 바치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절대로 시련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시련들과 마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우리는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며 그 시련들과 더불어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봉헌하면서 의탁해야 합니다. 시련들이 찾아온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열어드리고, 더욱 더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고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 말씀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사람, 우리의 삶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해주려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체험하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 그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주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부활의 힘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 부활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아시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하신 성모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성모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