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순교자 Ⅰ(돌린도 루오톨로 신부의 삶과 성소)
마음의 순교자 Ⅰ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의 삶과 성소
A Martyr of the Heart
마리아 즈브랄스카
교회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려 16년이 넘도록 미사 집전 자격을 박탈당한 채 살았던
비운의 사제가 있다. 여러분이라면 그런 교회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겸손과 순명만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 뜻대로 하소서 Gesu, pensaci tu》의 저자인
돌린도 루오톨로 Dolindo Ruotolo 신부의 말이다.
사제가 되기까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태생의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1882-1970)는 이미 네 살 때 어머니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암울한 현실을 알게 되면 그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당시 돌린도의 신심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에 있었고, 가족의 비극적인 상황이 돌린도의 미래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돌린도의 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이고 난폭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조금도 돌보지 않았으므로 그의 집은 언제나 가축우리 같았다. 식구들은 늘 굶주리고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밤마다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한밤중에 아이들을 깨워 실컷 두들겨 팬 다음 장롱에 아이들을 집어넣고서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지옥 같은 삶은 돌린도가 열네 살 때 어느 선교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면서 끝이 났다. 반면에 사제가 되기 위한 돌린도의 거룩한 여정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가 사제성소를 확신하고 오로지 하느님께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된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교육 덕분이었다. 첫서원 후에 돌린도는 중국에서 선교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중국에서 선교사로 살다가 아예 그곳에 뼈를 묻을 작정이었다. 그때 돌린도가 수도회 장상에게서 들은 대답은 그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수사님은 순교자가 될 겁니다. 그런데 수사님의 순교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내놓는 순교가 아니라 마음의 순교입니다. 수사님은 이곳에 계속 살아야 합니다. 중국 선교에 대해서는 다시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1906년 6월 24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제 서품을 받는 날이었다. 나중에 돌린도는 일기에서 이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성품성사가 얼마나 거룩한 성사인지를 깨달았지만, 그 거룩함을 말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
계속되는 시련
돌린도 신부는 서품 후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치고, 몇몇 교직을 겸하면서 일주일간 나폴리에서 사목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타란토로 전임 발령이 났고, 그곳 신학교에서 원장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았다. 신학교 원장은 돌린도를 심하게 괴롭혔다. 돌린도는 신학생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고,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굴욕적인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신학생들의 끔찍한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게 되어, 어느 날 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신학생의 잘못을 꾸짖으면서 결국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새 임지는 몰페타였으며, 거기서 그는 신학생들을 교육하고 동시에 영성지도까지 맡았다.
“몰페타에서 내 영혼을 은총으로 강하게 붙드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몇 시간이고 꿇어앉아 주님께서 직접 신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나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린도 신부의 진정한 십자가의 길은 1907년에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길은 지속되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무려 20년 동안이나 돌린도 신부를 짓눌렀다. 시련의 시작은 초자연적인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시칠리아의 어떤 여인이 찾아오면서였다. 그런데 이 여인이 돌린도 신부에게 털어놓은 것은 자신의 환시체험이 전부가 아니었다. 고해성사 중 그녀가 자기 조카를 육화하신 성령으로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해를 다 듣고 나서 돌린도 신부는, 성령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거부하면서도 그 여인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돌린도 신부는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그 여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이중적인 입장을 표명한 셈인데, 이 사건은 돌린도 신부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를 헐뜯고 깎아내릴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돌린도 신부에게 적대감을 지닌 이들은 그가 모호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그 여인의 증언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고, 결국 이단적인 사상이 유포되도록 조장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단자로 치부된 시칠리아 여인과 그 여인의 이단사상을 방조한 혐의를 받는 돌린도 신부는 급기야 바티칸의 시선을 끌게 되었고, 신앙교리성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말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심문과 조사를 받는 동안 돌린도 신부는 사제 직무수행 권한을 모조리 박탈당했다. 심지어 영성체조차 금지되었다.
1908년 3월, 수도회의 직권자들은 돌린도 신부를 수도회에서 제명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돌린도 신부는 이후 2년 반 동안 끊임없이 사도좌에 탄원서를 올렸고, 그 결과 로사노 교구로 이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직무 정지 상태였다.
놀라운 은총
사제단에서 외면 받고 가족에게서도 버림받은 사제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사제로서의 돌린도 신부의 존엄성은 완전히 땅에 떨어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 돌린도 신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내가 직접 말한다.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앞으로는 네가 나를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선포했으면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하느님 영광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자신을 다 내려놓고 내 앞에 굴복해야 한다. 내가 너를 도구로 쓸 것이며, 너를 나의 도구로 준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돌린도 신부는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았고, 천사들과 성모님을 만나는 은총도 받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예언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놀라운 은총을 받았음에도 돌린도 신부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우쭐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겸손했다.
돌린도 신부는 자신에게 내려진 직무 제재와 금지규정을 순명의 전신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를 가장 힘들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고 수많은 모욕과 불공정한 처사로 굴욕감을 안겼지만 돌린도 신부는 다 참아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을뿐더러,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과 교회를 향한 불만이나 비난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일도 없었다.
돌린도 신부는 자신이 받는 제재들에 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비판하지 못하게 했으며, 부정적인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는 오직 신앙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누군가를 새로운 신앙의 길로 이끄시려고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시험하신다. 나는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자존심 또는 존중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몰아붙이신다고 말이다. 거기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다 내려놓게 되며, 비로소 그의 고집은 꺾이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한 바로 그때, 가만히 눈을 감아보라. 그러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더 이상 장애물은 없으며, 그대는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더 높이 날아오르게 된다.”
예기치 않은 변화
1910년에는 중요한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6월 19일 돌린도 신부는 대주교와 몇몇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자유로이 그리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다는 서약을 엄숙하게 행했다. 그것은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저질러지는 모든 신성모독을 보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에게 특별히 요구하신 서약이었다. 예수님께서 돌린도 신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여기서 특이한 한 가지는 저 엄숙한 서약을 한 사람이 2년이 넘도록 미사 집전 금지 조치를 받은 신부라는 사실이다.
그해에 있었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사건은 교황청에서 돌린도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즉, 돌린도 신부에게 가해진 모든 직무제재를 취소하고 돌린도 신부를 복권시킨다는 선언과 함께 그의 결백함을 증명하는 서류들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돌린도 신부는 그토록 고대하던 미사와 여러 성사들을 집전할 수 있었고, 강론과 사목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물론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미사거행이었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때에도 크나큰 기쁨을 느꼈다. “고해성사는 참으로 위대한 성사임에 틀림없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고해성사를 줄 때 내 마음은 활짝 열린다. 내가 참으로 사제라는 것이 실감난다. 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해하는 저 모든 영혼들을 위해 어떠한 영적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오, 주 예수님, 부서져 내리는 한 영혼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시는 저 막강한 힘은 대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서 한 영혼을 겸손과 사랑과 회개의 찬미노래가 되게 하셨습니까? … 만약 세상이 고해성사가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지를 깨닫는다면 아마도 세상 모든 사제들은 당장 과로로 쓰러질 것입니다.”
돌린도 신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참된 회개로 이끌었지만 교황청에서 그에 대한 판결을 번복하는 바람에 그의 고해성사 집전은 얼마 안 되어 중단되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돌린도 신부는 또다시 –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 비방과 중상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의 사제 직무 제재 취소는 유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돌린도 신부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는 그가 사탄을 숭배하고 있다는 거짓 혐의를 씌웠고, 지난번의 시칠리아 여인 사건을 다시 끌어들여 그가 심각한 결정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돌린도 신부는 자신에게 내려진 불공정한 판결에 고통스러웠지만 “기도하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을 사랑하며” 교회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굴욕을 당했을 때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은 딱 두 가지다. 정신이 모조리 마비되어 무기력해지거나 온 힘을 다해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멸감을 극복해내는 방법은 순종의 자세로 내적인 평화를 지니고,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거룩한 존엄을 간직하는 것뿐이다.”
돌린도 신부는 조사가 진행되는 몇 주 동안 사제들을 수감하는 구치소에서 지내야 했지만, 무죄가 밝혀지면서 다시 나폴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박규희 옮김
(마리아지 2019년 7•8월호 통권 21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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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느님 뜻의 나라 ca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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