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2017 신앙체험수기]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께

Skyblue fiat 2017. 3. 16. 09:00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께

 

 

최은순(아녜스, 의정부교구 법원리본당)

 


 

밤새 눈이 내려 산야를 하얗게 덮어 놓았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능선이 선한 결 같고, 겨울나무가 눈옷을 두툼하게 입은 모습도 추워 보이지 않고 왠지 따뜻해 보여요. 그렇듯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 고요하네요.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과 축복에 가슴이 뭉클한 이 시간, 아저씨를 간호하며 이만큼 온 2년의 세월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아저씨께 편지를 쓰려고 이렇게 책상에 앉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저씨께 편지를 드리는 게 2년 만이네요. 영영,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던 아저씨께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 이렇게 살아 계시다는 게 말이에요.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그동안은 제가 아저씨를 상징적 키다리 아저씨로 제 안에서만 모시고 있었죠. 그런데 오늘은 편지에다 키다리 아저씨라고 직접 호칭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우선 키다리 아저씨께 저와 아저씨의 관계를 소개해야겠지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넌 누구냐? 도대체 누구기에 나한테 키다리 아저씨라는 둥 친애하는 아저씨라는 둥 부르는 거냐?” 하면서 궁금해하실 테니까요.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와 저는 한 형제라는 걸 밝힙니다. 아저씨는 일곱 남매 중에 셋째, 저는 여섯째. 그러니까 저의 친오빠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아저씨는 신앙적인 족보를 따로 가지고 있다는 게 특별한 점이에요. 아저씨는 ‘사제’라는 것, 그러기에 저와 형제라는 간격보다 하느님과 더 가까운 족보관계로 사시는 분이죠.
 

다음은 아저씨를 제 마음 안에서 왜 키다리 아저씨로 모시며 살았는지 알려드려야겠네요. 그건 바로 진 웹스터가 지은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난 후 생긴 마음이었어요. 고아인 소녀 주디가 어느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 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성장소설이죠. 작가가 꿈이었던 주디는 후원자인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꿋꿋한 모습으로 작가의 꿈을 이루게 돼요.
 

저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 주디가 저인 것 같고, 주디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키다리 아저씨가 꼭 아저씨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저씨도 제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준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저의 친오빠이지만 제겐 은인인 거예요. 아저씨가 신학생 시절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해서 저를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주셨잖아요. 그 시절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기에 그때 아저씨가 입학금을 대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끝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중학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로 글솜씨가 있는 저는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지금 이렇게 동화작가가 되어 있는 거지요. 중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그 시작이 제게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씨앗이 되었던 게 분명해요.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는 사제가 된 후 몹시 바쁜 분이 되었어요. 특히 병원에 특수 사목 소임을 맡고 나서부터요. 저는 그때 “병원 일이란 산처럼 크다”는 말을 듣고는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를 비롯해 우리 형제들이 아저씨를 무척 보고 싶어 했지만, 아저씨를 한번 만나려면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20여 년 만에 병원 일을 그만두게 되었죠. 이젠 아저씨를 실컷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필리핀으로 가서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그러고는 우리 형제들에게 쓸쓸함만 크게 주고 떠나 버리셨죠. 필리핀에서 제일 가난한 곳, 굶는 이들이 많은 곳, 병든 이들이 많은 곳으로요.
 

그날부터 저는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저씨란 분은 얼굴을 보기란 아득히 멀고 먼 분이라고. 멀찍이서 기도로만 만나 볼 수 있는 분이라고! 저는 문득 낯선 타국에 있는 아저씨가 무척 외로우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딴 섬, 등대, 저녁노을, 깊은 밤 달빛, 깊은 산 속의 한 송이 꽃처럼요. 그래서 이삼일에 한번, 늦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아저씨한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던 거예요. 편지를 받아보면서 외로움을 달래보시라고요.
 

그런데 아저씨께서 제게 하신 말 기억하세요? 굶는 아이들에게 무료 급식을 하고, 병든 이들에게 치료해주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는데 아주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신 그 말요. “이곳에 주님의 뜻이 있으시다면 여기 계획에 참여하는 은인들뿐 아니라 혜택을 받을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이용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든 나의 삶에 관여하는 이들이라 믿어진다.” 그런 말씀도 덧붙이셨지요.
 

 

 

 

▲ 그림=문채

 

 

 

아! 그래서 저는 이제 더 이상은 아저씨의 삶을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자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대신 기도하는 시간을 늘렸어요. 그러고는 아저씨가 그리울 때마다 기도 속에서 만나는 시간을 갖곤 했어요. 그러자 마음이 놓이고 평온해졌어요. 기도 중에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저에게 기도의 맛을 가르쳐주신 분이었어요. ‘기도가 제일이다. 기도가 곧 평화다’라는 걸요. 참 신기했어요. 기도 시간을 늘리면 늘릴수록 맛있는 음식 앞에서 군침이 돌 듯 기도의 단맛을 느끼게 되었거든요. 저는 마치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말하자면 저의 든든한 백이 생긴 것처럼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님만 믿고 아저씨 걱정일랑 절대로 안 하겠다고 밀어붙였죠. 무서운 태풍이 수시로 마을을 덮거나 휩쓸어 가는 곳, 우범지역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 뉴스를 통해 들리는 필리핀 태풍 소식과 무서운 사건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도 아저씨에게는 걱정할 일이 생기질 않았죠. 그래서 예수님 백만 믿게 되었어요.
 

그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점점 충만해져 가던 어느 날, 예수님이 잠깐 한눈을 파신 건지, 졸고 계셨던 건지. 도대체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아저씨가 ‘골수이형성증후군’이란 병에 걸리도록 모르고 계셨다니요. 예수님 사랑 실천에 온전한 마음을 향하셨던 아저씨를 아프게 만들다니요!
 

저는 다시 마음이 변해 예수님이 무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미웠어요. 깊은 원망까지 생겼어요. 그 순간 마음에서 하던 기도가 다 멈춰버렸어요. 수혈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에 얼마나 무섭고 떨렸는지 아세요? 결국, 아저씨는 패혈증으로 위독해져 비행기로 실려 오셨죠.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가 저에게 말씀하셨죠, “중환자실의 무균실까지 가게 된 그 일이 하나도 기억에 없다”고. 그때 병실에 누워 계셨던 아저씨 모습이 어땠는지 아세요? 다 터진 입술에 핏물이 말라붙고, 핏기란 하나도 없는 얼굴로 고열이 가라앉질 않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요.  

너무 불쌍해서 눈물만 나고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아저씨가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까 봐 몹시 무섭고 떨렸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를 다시 이동 침대로 옮기더니 중환자실 무균실로 황급히 데려가는 거예요. 병실에 왔던 수녀님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저에게 중환자실로 들어가시는 걸 본 뒤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저는 제정신이 아닌 채 이동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따라갔죠. 그런데 아저씨 얼굴을 한 번 더 볼 틈도 없이 중환자실 문이 순식간에 열리고 순식간에 닫혀버렸어요. 아저씨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엄마랑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런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여러 생각이 기억으로 스치더라고요. 아저씨가 사제가 되기까지 또 사제가 된 후에도 오직 기도만 하셨던 세 분의 신앙심이 생각났어요. “열매가 다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제의 길”이라며 기도하셨던 우리 할머니. 묵주 알이 닳아서 쌀알만큼 작아지도록 기도하셨던 우리 아버지.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늦게까지 하루가 부족하도록 기도만 하셨던 우리 엄마. “아저씨가 거룩한 사제로 살아가는 게 제일 큰 간절함”이라고 하셨던 세 분의 모습이 제 기억 속에서 아주 뚜렷하게 떠올랐어요. “할머니, 아버지, 엄마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 거”라고 했던 마을 사람들의 말도 스쳤어요.
 
저는 문득 겁이 났어요. 예수님을 원망하는 제 마음이 혹시라도 세 분이 아저씨를 위해 쌓아놓은 기도를 무너지게 할까 봐. 그 기도가 무너지면 아저씨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야속한 마음을 이내 풀었어요. 그러고는 아저씨가 무균실에 계시는 동안 온전히 예수님께 기도만 하게 되었어요. 참 신기했어요. 제가 억지로 애쓰지도 않았는데 제 마음이 이렇게 변한 게.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건 예수님을 믿어보려는 저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며칠 후,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아저씨를 살피던 수녀님이 우리 형제들을 병원으로 불렀어요. 왠지 불안했어요.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가서 무균실에 누워 있는 아저씨를 만나보라는 거예요. 그때 아저씨를 만나보고 나오던 한 신부님이 말했어요. “너무 늦었다고!”. 그 말은 곧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었죠.
 

저는 이제 이별의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는 아저씨를 볼 수 없는…. 제가 아저씨를 만날 차례인데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목으로 올라오는 울음을 꽉 물고 아저씨가 누워계신 무균실로 들어갔어요. 저를 알아보시는 건지 마음으로 느끼시는 건지 제 손을 꼭 잡으셨어요. 아저씨와의 만남은 말이 없는 침묵 상태로 손을 잠깐 잡아 본 게 다였어요. 더 머물 수 없고, 부여잡을 수 없었던 짧은 그 순간이 정말 아쉽고 슬펐어요.
 

저는 “하루만 더, 제발 하루만 더… 아저씨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어요. 그러면 기도대로 정말 하루를 더 살아내셨어요. 날이 밝으면 저는 또다시 “하루만 더…”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됐어요. 그런데 기적처럼 아저씨는 삼일, 사일, 일주일이나 더 견뎌 주셨어요. 아니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신 거였어요.
 

며칠 사이 폐렴균 원인이 밝혀지고 고열이 내리면서 무균실에서 나오셨어요. 꿈만 같고 믿어지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감히 판단할 수 없고 넘나들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아저씨와 이별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는데 아저씨를 이렇게 살려 주셨잖아요. 저는 이런 게 기적이라고 믿었어요. 아저씨를 위해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 아버지, 엄마처럼 오직 기도뿐이었죠, 그리고 얼마나 많은 분이 기도를 해주고 있었는데요.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 거예요. 저는 예수님한테 감동해 “예수님은 정말 멋지다”고 마음속으로 소리쳤어요. 그러고는 더 많이, 더 정성을 쏟아 기도를 바치게 되었어요.
 

제 기도대로 하루하루 빛 같은 희망으로 벅찬 시간이 이어졌지요. 저는 병실에서 아저씨를 보살펴드리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바라던 때가 온 거라고 믿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그동안 살면서 키다리 아저씨께 은혜 갚을 기회를 늘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병원 일을 그만두셨을 때 어디에 계시든 사제관으로 출근해서 아저씨를 돕겠다고 했어요. 맛있는 밥을 해드리고 청소와 빨래를 해드리겠다고. 허락만 해주신다면 아주 정성껏 살펴드리고 싶었어요. 진심을 담아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요. 그런데 필리핀으로 훌쩍 떠나버리시는 바람에 기회가 사라진 거였어요.
 

저는 키다리 아저씨와 병실에서 밥도 같이 먹고 매일매일 많은 얘기도 나눴어요.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털고 일어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간절함으로 매달렸던 청원기도를 감사기도로 돌리고 있었죠. 그런데 왜 또 갑자기 형제들을 모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가슴이 철렁했어요. 불안한 제 짐작대로, 아침마다 회진하던 교수님이 가슴이 무너지는 말을 했어요. “급성백혈병으로 진행됐다”고. 골수 검사를 한 결과에 반응이 나타난 거였어요. 교수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치료방법의 희망을 얘기했고, 앞으로 골수이식을 진행해야 할 순서를 서두르는 빛으로 말해주셨어요.
 

형제들 모두 유전자 검사, 형제들 모두 완전 일치자 없음. 골수공여자 28만 명 중에도 완전 일치자가 한 명도 없음. 반일치 자로 나온 막내 오빠의 골수로 이식 고민, 반일치 골수이식 하기로 결정.
 

결국, 반만 맞는 막내 오빠의 골수로 이식하게 됐어요. 저는 아저씨의 생명이 걸려 있는 골수이식 진행이 빨리빨리 됐으면 하는 조급증으로 가슴이 타들어 갔어요. 하지만 절차대로 차근차근 응해야 하는 것, 그것 또한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는 분이 아니라는 걸 또다시 믿고 싶어졌어요.
 

키다리 아저씨!
골수이식을 하기까지 그 과정은 다 기억나시죠? 그렇게 절망과 희망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마음을 얼마나 졸이고 아팠는지 아세요? 하지만 절망과 희망 사이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꼭 현존한다는 걸, 믿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무균실에서 아저씨를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죠. 믿음도 절망과 희망을 넘나드는 단련을 통해 확고해진다는 걸 저는 깨달았거든요.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는 그 어려운 골수이식을 하게 되고, 다시 무균실로 들어가 계시고. 또다시 저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잘 이겨내 주시길 바라는 기도를 입에 달고 있었어요. 오직 기도뿐, 다른 일과 생각을 다 멈춘 시간이었어요. 피를 나눈 형제의 뜨거운 마음이, 골수를 준 형제의 뜨거운 사랑이 아저씨의 몸 안에서 잘 생착되기를! 그때 아마 저는 세상에 태어나 예수님을 제일 많이 불렀고, 기도를 가장 많이 한 시간이었을 거예요.
 

아저씨는 무균실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고 계셨죠. 미사주를 끓이고 제병을 구워서 미사를 드렸다면서요. 혹시라도 감염되면 골수이식 한 게 수포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하지만 아저씨는 그 시간을 얼마나 충만하게 지내셨는지 다 알아요. 저와는 다르게 아저씨는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평화롭게 계셨죠. 그렇게 무균실에서의 하루하루가 실낱같은 희망으로 이어지고 아저씨는 무균실에서 40일 만에 나오게 되었어요. 나와서는 “죽음에 이르는 체험을 은총으로 받았다”고 말하셨어요. 그 순간 저는 참사제인 아저씨 모습을 보았죠. 콧속이 맵고 뭉클했어요.
 

새해 1월 10일이면 아저씨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실려 온 지 2년이 되는 날이네요. 지나온 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되짚어 보는 이 시간이 자꾸만 울컥울컥 합니다. 아저씨가 계신 이곳은 창밖으로 산과 산이 포개진 풍경이 보이고, 노을 질 무렵이면 하늘길을 따라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볼 수 있는 곳이죠. 아저씨 성품만큼이나 조용하고 적막한 곳이에요.
 

아저씨가 퇴원해서 이곳으로 오시던 날, 저는 병원에서처럼 여기서도 아저씨를 위해 온 정성으로 간호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저의 은인인 키다리 아저씨께 제대로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이 더 깊게 일었던 거예요. 그래서 정말 기뻤어요. 예수님이 더 바랄 것 없는 기회를 제게 주신 것 같아 짜릿했거든요. 더구나 모든 저의 환경이 아저씨를 돌봐드릴 수 있는 조건으로 걸림돌이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차근차근 주변 일을 정리했죠. 제일 먼저 제가 하고 있던 학교 강의 일을 놓기로 결정했고, 즐거움으로 늘 잡고 있던 원고작업도 뒤로 미뤘지요. 제가 사는 파주 집 살림은 임용고사를 공부하고 있는 둘째 딸이 도맡아 하기로 했죠. 자신의 공부를 하면서 고등학교 2학년인 동생을 살펴주기로. 서울에서 큰딸과 생활하는 남편은 주말에만 집에 내려오는 상황이었으니, 제가 이곳에 상주하며 아저씨를 간호하는 데에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저도 주말에는 제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아, 그런데 아저씨, 골수 이식 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은 얼마나 어마어마했던가요. 멸균음식, 마시는 물, 식기 소독, 살균을 시키는 청소 등 감염이 안 되도록 주의해야 하는 일이 매 순간 저를 긴장시켰어요. 음식을 하는 손이 문제가 될까 염려돼 손톱이 자라기 무섭게 바짝 깎았고, 시시때때로 손을 씻는 일로 손에 물기 마를 새가 없었죠. 집안에서 날아다니는 먼지 하나까지도 아저씨한테 해롭다고 했으니까요. 먹을 수 있는 음식보다 제한 음식이 더 많아서 세세히 기억해야 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간병 교육을 받을 때 받은 책자를 보고 또 보며 외웠어요.
 

그 어떤 사람도 들락거리지 못하게 격리하는 일은 참 힘든 일이었어요. 심지어 가족들이 오는 것도 금지했으니까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먼지 바람조차 감염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골수이식 후 생활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굉장한 고통이었어요. 그때 아저씨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하지만 외로웠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꺼이 받아들이셨겠지요. 참을성 많은 아저씨의 의지는 예수님도 다 알고 계셨을 거예요.
 

키다리 아저씨!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우셨다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입안은 온통 헐어서 뜨겁고 매운 것을 먹는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못 하셨죠. 음식 자체를 몸에서 거부하는 탓에 체중이 무섭게 줄기 시작했잖아요. 손으로 물컵조차 들지 못할 만큼 온몸에 힘이 소진되었고, 손이 떨려 글씨도 제대로 쓰지 못하셨죠. 약을 삼킬 힘도 없어 알약이 목에 걸려 쩔쩔매시던 모습까지…. 서리를 맞아 풀썩 주저앉은 풀처럼 어느 순간 아저씨 몸이 맥없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어요. 아저씨 말소리까지 힘이 다 빠져서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어요. 그런 몸으로 매일 미사를 드리셨지요.
 

아저씨가 기운차리는 일은 겨우 한 눈금, 한 눈금만큼이라 천 리 길을 가야 할 일처럼 더디게만 느껴졌지요. 그동안의 지나온 일들을 어떻게 다 말로 할까요. 하지만 그 한 눈금은 분명 빛으로 가는 줄기였기에! 이제부터는 아저씨 앞에 놓인 게 이별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믿기에!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어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저물고 다시 새날을 맞는 일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그러기에 단 하루의 시간이 산처럼 큰 감사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아저씨가 새로 태어나는 그 신비는 또 얼마나 놀라웠고 감격스러웠는데요. 새 골수가 아저씨 몸 안에서 생착되어가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그 신비스러움 말이어요. 손톱, 발톱이 새로 나고, 머리가 새로 나고, 심지어 피부까지 벗겨져 새로운 살갗이 되는…. 그 생명의 아름다운 신비가 아저씨 안에 다 들어 있었어요. 고통과 통증을 침묵으로 이겨내시는 아저씨의 모습은 새싹을 틔우기 위해 땅속에서 온 힘으로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생명과 같았어요. 아저씨의 모든 변화는 예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건지 눈부시게 보여주는 체험이었죠.

 

▲ 그림=문채현


 

 

키다리 아저씨! 사람들은 말하죠, 자기 일을 놓고 아저씨를 돌보는 제가 천사라고. 하지만 천만에요. 오히려 아저씨를 통해 제가 엄청난 은총을 받은 시간이 되었는걸요. 제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됐다는 것, 슬픔과 고통이 닥쳐도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됐다는 것, 아저씨를 간호하며 기도의 단맛을 느꼈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우선으로 사랑하게 됐다는 것. 이렇듯 저를 예수님의 딸로 깊이 철들게 해주었는걸요. 그러니까 신앙인인 제게 이보다 더 엄청난 선물은 없을 거예요.
 

키다리 아저씨! 제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은인이 되어 주시더니 이번엔 제게 깊은 신앙심을 심어 준 은인으로 감격을 주셨습니다. 저는 아저씨를 간호하며 주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아저씨가 완치를 향해 겪으며 가는 이 모든 과정은 어둠이 아니라, 희망이고 빛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키다리 아저씨!

2016년 12월을 보내며, 최 아녜스 올림

 

 

 

- 출처: 평화신문 2017. 03. 12발행 [14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