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 작년 늦가을부터였다
작년 늦가을부터였다
특별상(가톨릭학교법인상)
이영희 (아녜스, 부산교구 남천주교좌본당)
작년 늦가을부터였다. 막내가 운동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편두통이라고 약을 처방해주면서 통통한 편인 딸에게 살을 좀 빼야겠다고 조언했다. 안 그래도 다이어트에 부쩍 신경 쓰고 있던 아이가 툴툴거렸다. 약을 먹어서 확 나아진 건 아니지만, 사춘기에 흔히 겪는 편두통이라는 의사의 말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었다.
연말을 시댁에서 보내면서 치킨과 피자 같은 기름진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먹는데 아이는 식욕이 넘치던 평소와 다르게 많이 먹지 못했다. 집에 와서 토하는 아이를 보면서 체했다고 생각했다. 손을 따주고 약을 먹이고 아이를 재웠는데 이튿날에도 계속 토했다. 입맛이 없고 피곤하다며 잠을 계속 잤다.
소아과에 가니 ‘노로바이러스’라고 했다. 링거를 맞히고 며칠간 병원에 다녀도 나아지지 않아서 내과로 갔다. 꾸준히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공을 물고 말하는 기분이라는 아이의 발음이 어눌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성당의 아는 분이 계시는 신경과로 갔다. 선생님은 뇌에서 오는 문제로 보인다고 소견서를 써주면서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아득해졌다. 문제가 있는 곳이 다른 데가 아니라 ‘뇌’라는 게 겁이 났다.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는 계속 토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가 거의 까부라졌고 응급실에서 바로 MRI를 찍었다. 검사결과는 바로 나왔다. 뇌종양이고, 더 검사해야 확실하겠지만 사진상으로는 악성으로 보인다고 했다. 뇌 안에 종양이 큰 게 있고 그 주변으로 작은 종양들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MRI 사진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종양을 보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것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언제부터 생긴 걸까. 저것들을 머릿속에 담고 아이는 지금까지 어떻게 견디고 있었을까. 우리 세미. 우리 세미를 어떡하지….
▲ 그림=문채현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신경외과 병동에 아이를 입원시켰다. 스테로이드제로 일시적인 호전이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대로 몸 상태가 좋아진 아이는 휴대전화기로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았다. 척수 검사, 피검사, 소변검사, 펫시티(PET-CT) 등, 검사가 어찌나 복잡하고 많은지 검사하느라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고문이었다.
잠시 상태가 좋아졌을 때 아이의 친구들이 왔다. 병명을 결핵으로 알고 있어서 “결핵이 나으면 레드봉봉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수다를 떠는 아이 얼굴에서 생기가 돌았다. 아이는 돌아가는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었고 불편한 걸음으로 링거를 밀면서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스테로이드제의 효과는 길지 않았다. 반짝 좋아졌던 세미는 점점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상태가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주치의가 우리 가족을 불렀다. 최종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 ‘악성 뇌종양’이었다. 이 병의 특징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고 발병 후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일 년 안에 사망한다고 했다. 아이의 종양은 숨골 가까이 있어서 수술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 인터넷을 뒤졌다. 의사의 말과 100% 일치했다. 고마운 건 우리 가족에게 어설픈 희망 고문을 하지 않았고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정보를 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날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가 발로 디디고 있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나의 익숙한 세계가 뿌리째 뒤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냥저냥 일도 잘되어가고 성당 활동도 무난하게 하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어서 하느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은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있는 우리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는 건가. 이게 뭐지. 이건 뭐지. 이게 뭐냐 구요.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세미는 유아 세례를 받고 난 후 첫 영성체를 초등학교 5학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했다. 그리고 복사를 했다. 해가 뜨기 전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성당에 가서 새벽 복사를 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추는 엷은 살굿빛 여명 보는 것을 좋아했다. 성당 어르신들이 “하얀 복사복을 입은 아이의 얼굴이 보름달 같이 빵빵하고 환하다”고 인사를 건네시곤 했다.
건강할 때보다 살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이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포동포동했다. 아이 머릿속 암이 퍼지는 빠른 속도로 보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소식을 듣고 본당의 주임 신부님과 부주임 신부님이 한달음에 와주셨다. 이후 수녀님들이 오시고 친분이 있는 신부님들과 수사님들도 틈틈이 오셨는데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그 시간들이 더없이 감사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꿈을 꾸었다. 아기를 업고 시장통을 헤매고 있었다. 계속 포대기 끈이 풀렸다. 아기가 떨어질까 봐 끈을 아무리 매려고 해도 풀어지고 또 풀어졌다. 헛손질만 계속 하다가 잠을 깼다. 우리 세미. 우리 세미를 어째야 하나…. 자고 있는 아이 옆에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는 비틀거려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37, 24) 절박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은 가장 강력한 항암제였다.
좀 더 적극적인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허리까지 퍼져있는 종양 조직 검사를 위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이는 다행히 수술을 잘 견뎌주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아이 옆에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내가 중간중간 놓치고 헤맸는데 아이가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희미하게 묵주기도를 함께 따라 했다. 그리고는 성호경을 긋고 기도 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세미가 최고다. 최고!
허리 수술 후부터 아이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매일 아이의 영혼이 1g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결국, 감염의 위험 때문에 아이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대부분 고령의 환자들이 누워있는 중환자실은 여기저기서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울리고 독한 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곳에 아이를 혼자 두고 나오면서 많이 울었다. 왜 열여섯, 어린 내 딸이 저 안에 누워있어야 하는지 슬픔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이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하루 두 번 면회를 위해 우리 가족은 병원에서 가까운 시댁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의 시계추는 세미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이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도 가고 싶고 책상 위에 두고 온 「빨강 머리 앤」을 읽고 싶다”고 했다. “아직 결핵약이 안 나왔느냐며 좋은 결핵약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 병원에 아이를 버리고 오는 기분이 들어서 슬펐다. 병원에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다 보면 골목길 안에 성당이 있었는데 오래된 성전의 낡은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하면 스테인드글라스로 스며드는 푸른 햇살이 겨울 냉기와 우리의 슬픔을 누그러뜨렸다. 그 겨울의 성당은 참 따뜻했다.
의사들과 오랜 논의 끝에 우리는 아이의 뇌수술을 어렵게 결정했다. 목숨을 걸고 머리를 열어야 하는 수술이었다. 치료를 위한 수술이 아니라고 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종양이 숨골을 막아서 어쩌면 갑자기 사망할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우리는 수술을 결정했다. 종양이 조금이라도 제거가 되면 아이의 여명이 좀 더 길어질 수 있다는 게 희망이었다. 아이에게는 “지난번 허리를 연 수술처럼 머리를 열어서 하는 수술”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이가 당부했다. “나 아프지 않게 마취 잘해달라고 의사 샘한테 부탁해줘.” 머리를 깎고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세미가 말했다. “모두들 사랑해.”
여섯 시간으로 예상한 수술은 일곱 시간, 여덟 시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수술 시작 전부터 병실 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기다리던 우리는 불안한 마음을 기도로 봉헌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수술실 문이 열렸다.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다. “예상시간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긁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암 덩어리를 없앴다”고 했다. 마치 그 말이 암이 다 나았다는 말처럼 기쁘게 들렸다.
아이는 마취가 깨자 의사 지시대로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손을 잡자 세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도 힘이 있었다. “앞으로 경과가 좋을 것 같다”며 다들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쁨의 순간은 더없이 달콤했지만, 더없이 짧았다. 다음날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을 때 밤사이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아져서 아이는 인공호흡기를 단 상태였다. 우리가 말을 걸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수술 전에 의사가 “신경 가까이 있는 종양 수술이라 후유증으로 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설명했던 게 생각났다. 아,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이제 다시는 아이와 소통도 교감도 할 수 없는 건가. 그동안 아이 앞에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있던 우리 가족들은 중환자실 안에서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아이를 보낼 준비를 하시는 게 좋지 싶습니다.”
전혀 반응하지 않던 세미가 이틀 정도 지나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면회시간에 가서 “세미야!” 하고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뜨고 시선을 우리 쪽으로 옮겼다. 용돈을 듬뿍 넣은 자기 통장을 보여주자 눈이 커졌고 친구들에게서 온 사진과 문자를 보여주면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을 움찔대기 시작하고 다리도 다시 움직였다. 그랬다. 우리가 체감하는 세미는 그렇게 금방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의사가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는 돌아눕지도 일어나 앉지도 못했지만 “춥다” “목마르다” “돌아눕고 싶다”는 등 자기 마음을 손과 다리로 표현했다. 상태가 좋은 날은 활발하게 소통을 하고 쳐지는 날은 죽음같이 깊은 잠만 잤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하루살이처럼 살기로 했다. 불확실한 미래, 내일까지 걱정하지 말자고 했다. 당장 지금 오늘 하루만 무사하게 지나도 감사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건 몇 번이고 물어봐도 아이는 “한 번도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수술한 허리도 머리도 아프지가 않다”고 했다. 평소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이는 투병기간 내내 식사를 못 하고 링거와 콧줄에 의지했지만, 살이 많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미의 통통한 뺨을 보며 아픈 게 맞나, 농담하기도 했다. 정말 신기하고도 감사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중환자실에서 두 번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세미도 저렇게 갑자기 하늘로 가면 어떡하지. 우리는 “아이를 병실로 보내 달라”고 주치의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일반 병실은 응급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적인 대처가 힘들다”고 의사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아이를 책임지고 잘 돌볼 수 있다”고 다짐했고 아이의 멘탈 상태가 호전되면서 주치의는 아이가 병실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이의 가래를 뽑고 콧줄로 식사 주는 법, 소독 처치, 욕창 방지 등 환자 돌보는 법을 간호사에게 배워 숙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의료진의 걱정을 뒤로하고 병실로 올라올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한다는 기쁨에 들떠있는 우리에게 주치의가 심각하게 조언을 했다. “심장마비 같은 응급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당장은 감염이나 폐렴이 제일 위험하니 24시간 보살핌에 집중하라”고.
사방이 벽으로 막힌 중환자실에서 창문이 있는 일반 병실로 올라오니 천국 같았다. 탁자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올려놓고 집에서 가져온 카세트로 성가 음악을 틀었다. 인공호흡기와 여러 개의 링거를 얼기설기 달고 올라온 세미를 침대에 눕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호사들과 온 가족이 매달려 아이를 편안히 눕힐 수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주자 세미의 혈색이 좋아지면서 살짝 미소가 번졌다. 처음으로 흡입기로 가래를 뽑아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시작했지만 호스에 세미 목 안의 부드러운 살이 닿는 느낌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마비가 많이 진행된 상태여서 아이는 발을 움직이거나 손을 까딱거리는 걸로 간신히 의사표현을 했다. 묵주를 아이의 손에 걸치고 우리는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다. 성경과 「빨강 머리 앤」을 번갈아 읽어주었다.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아이와 평생 이 병실 안에 함께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빨강 머리 앤처럼 엉뚱한 상상도 했다. 이 병실이 노아의 방주여서 밖에는 홍수가 내리고 이곳은 하느님 마련하신 거처이며 곧 물은 다 마를 것이고 그때 우린 밖으로 손잡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모니터로 세미의 맥박과 산소포화도를 수시로 검사하고 인공호흡기 알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자느라 깊이 잘 순 없었지만, 긴장 탓인지 아침에 일찍 눈이 뜨였다.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세미의 첫 숨소리는 반갑고 감사했다. “호흡의 주관자이신 주님. 오늘도 세미의 들숨 날숨에 매 순간 함께 해주세요. 아멘!”
아침에 눈 뜨면 성가부터 틀었다. 묵주기도를 함께하고 정갈해진 마음으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점심을 먹고 느슨한 오후에는 클래식을 틀고 「빨강 머리 앤」을 읽어주었다. 신부님이 시간 날 때마다 오셔서 미사를 해주셨다. 침대 옆 탁자에 제대를 차리고 세미를 위해 봉헌하는 작은 미사는 우리의 병상일지 갈피갈피에서 방점을 찍었다.
그때에 우리를 위로하는 사람들 안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었다. “어딜 가서 누구 안수를 받고 어떤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더라” “아이가 어느 용한 목사를 만나기만 하면 살 것”이라는 등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지기 직전인 우리 안 깊은 곳, 약한 곳을 파고들면서 우리 종교와 다른 영역으로 넘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상냥함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시끄럽고 불안했다.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따라오면 아이가 구원받는다”며 너무도 확신에 차서 목청 높여 기도하는 그들을 몰아내고 문을 닫아걸었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고 어떤 확실한 답도 주지 않는 기도에 지쳐 있었지만,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짜라는 것을. 진짜는 하느님 단 한 분, 내가 오랫동안 믿어온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만약 그들이 말하는 그런 게 믿음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슈퍼맨이 되셨을 것이다.
병원에서 부활절을 맞이했다. 병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목련꽃 나무가 하얗게 피어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새로운 계절이 들이닥치다니 화사한 봄 풍경 앞에서 차오르는 슬픔으로 서걱서걱했다. 성당 친구에게서 부활 메시지가 왔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을 믿고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믿으며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을 믿는 그런 신앙인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 삭막한 병동에서 맛보는 목련꽃 평화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고 있어. 근데 지금 어디서 뭘 하시는지 참…. 바쁘기 짝이 없는 여기 병동 의사나 간호사보다 더 뵙기가 힘들다.”
그렇게 부활절이 지나고 4월이 왔다. 순조롭게 지내던 세미가 혈압과 열이 오르면서 계속 딸꾹질을 해서 너무 걱정되었다. 며칠 사이에 아이는 부쩍 상태가 나빠졌다. “아침부터 계속 세미 생각이 많이 난다”면서 오후에 신부님이 오셨다. 신부님은 영성체를 못 하는 세미의 손에 포도주잔을 올려 주셨고 아이 옆에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에 맞추어 조근 조근 강론을 해주셨다. 세미가 복사 설 때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때에 세미는 눈을 신부님께 향하고 귀를 열고 듣고 있었다. 그 날 세미와 우리가 교감하던 그 순간을, 세미가 신부님께 집중하던 그 눈빛을, 미사에서 이루어진 그 ‘신비’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미사가 끝나고 난 뒤부터, 아이의 눈이 안으로 몰리면서 확연하게 의식이 쳐지기 시작했다. 호출을 받고 온 의사는 세미를 살펴보고 “뇌사가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아침부터 뇌사가 진행됐을 거라”고 했다. 나는 “방금까지 세미가 미사에 초 집중했고 신부님 말씀에 뚜렷하게 반응했다”고 말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멘탈 상태에서 환자가 보고 듣고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가 모르는 것을 신부님과 우리 가족은 알고 있었다. 세미가 남은 생명을 모두 모아 마지막 미사에 봉헌하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을.
뇌사 선고를 받고 아이는 사흘 더 우리 곁에 있었다. 세미는 세상 평화롭게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전과 다름없이 우리는 책을 읽고 성가를 들려주었고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 사흘간 내가 붙잡고 있던 말씀이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이사 5,10)
세미는 4월 9일, 새벽에 하늘나라로 갔다. 처음 세상에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볼은 포동포동했고 표정은 편안했다. 경황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우리 가족들을 위해 달려와 준 성당 분들이 수고로운 많은 일을 맡아서 해주셨다. 그런데 그 날은 결정할 것과 치러야 할 절차가 너무 많았고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아이와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때를 떠올리면 많이 안타깝고 아프고 슬프다. 말없이 누워있던 아이의 통통한 뺨에 실컷 얼굴을 비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나중에 세미를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꼭 말해주고 싶다.
“수고했어. 세미야. 병실에 누워 있는다고 애썼어. 답답했지. 세미. 많이 아팠지. 세미. 너의 이 통통한 볼이 그리웠어.” 하고 세미의 아기같이 통통한 얼굴에 뽀뽀를 막 하고 싶다.
병원에서의 긴 여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에 놓인 세미의 피아노가 우리를 맞이했다. 큰딸은 현관 앞 세미 운동화를 신발장에 집어넣었다. 세미 방문을 굳게 닫았고 피아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제 스무 살, 언니의 몫은 어른인 부모의 몫과 확연히 달랐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집이 더 힘들다”고 큰딸은 말했다. “병원에서는 아픈 세미여서 세미가 하늘나라 가는 순간 이제 더 안 아플 테니 잘 가라고 인사했는데, 집에 오니 건강했던 동생 모습이 여기저기 보여서 견디기가 힘들다고.”
매일 밤 자리에 누우면 세미가 밀물같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웃음도 많고 말도 많았던 막내가 없는 집이 한없이 쓸쓸해서 대낮에도 방마다 불을 켰다. 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몰래 세미 방에 들어가서 일기장과 메모지들, 편지들을 읽으며 울었다. “노로바이러스가 다 나으면 먹겠다”고 사달라고 한 조청 유과 한 봉지와 롤리팝 사탕 두 개가 책상 서랍에 들어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붙여둔 아이의 버킷리스트를 읽고 또 읽었다. ‘수학 열심히 하기, 3㎏ 빼기, 방탄소년단 콘서트 가기, 내 인생에 만족할 줄 알기.’
문득 아이 책상을 보았는데 매일 넘기는 말씀 달력이 병원에 입원한 1월 16일에 멈추어져 있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르 2,17)
▲ 그림=문채현
우리 가족은 가방을 싸서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었다. 그곳에서 새벽 미사를 하고 밥을 먹고 산책하고 햇볕을 쬐고 성체조배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수사님들과 함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로 하루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 깊은 잠을 잤다. 종소리로 새벽을 열고 종소리로 밤을 닫는 고즈넉한 그곳에서 세상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수사님들이 직접 구운 식빵에 무화과 잼을 바르고 따뜻한 우유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 주었고 입구의 복사꽃 나무부터 조팝나무, 냉이꽃, 꽃다지. 반지 꽃, 영산홍, 금낭화, 히아신스…. 수도원 구석구석 핀 들꽃들은 우리를 향해 생명력을 뿜어냈다. 4월의 수도원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수도원 풍경이 천국을 닮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게 왜관에서의 일주일은 우리에게 보약과 같은 시간이었다. 수도원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확실히 우리는 달라졌다. 그 일주일간 수도원에서 받은 에너지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왜관수도원으로 무작정 짐을 싸서 떠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이 아니었을까.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책 제목처럼, 이제 와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우리의 눈물이 떨어진 발자국 발자국마다 하느님 은총이 함께 찍혀있었다.
기도하다가도 가끔은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욥의 말처럼, “편안하게 살던 나를 깨뜨리시고 덜미를 붙잡아 나를 부수시며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신” 그분 앞에 쥐고 있던 묵주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눈물에 가려 기도조차 할 수 없어서 촛불 하나 켜놓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도 한다. 때로는 세미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정말 죽어버릴까 하는 순간도 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치밀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수록 그분이 더 많이 더 깊이 더 뜨겁게 믿어진다. 지금껏 소문으로만 듣던 하느님을, 아이를 잃은 상처와 아픔을 통해 비로소 내가 직접 느끼고 매달리고 찾게 되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이다. 세상에서 믿는 단 한 분은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자녀로서 당당하게 그분께 청한다. 좀 하나 없다는 안전한 그곳 천국에서 세미를 잘 돌보아 주시기를. 남은 우리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당신이 나의 주치의가 되어주시기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 삶을 소풍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짧은 소풍을 끝내고 세미는 갔다. 우리는 분수리 하늘정원 천주교 묘지에 있는 스텔라의 산소 앞 작은 비석에 글을 새겼다.
‘귀여운 세미, 짧은 소풍 마치고 천국으로 떠나다.’
- 출처: 평화신문 2017. 03. 05발행 [14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