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시작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이승훈 세례. 명례방 집회.)-김길수 교수 강의 정리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이승훈 세례. 명례방 집회.
한국 천주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주적 신앙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후기의 사회변동 속에서 진지하게 참
진리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이 학문적 진리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종교적 욕구를 추구하는 변화를 보였다. 교회도 없는 곳에서
한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경우는 세계교회 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사건이지만 이것이 민족의 구원사로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천진암 강학회가 고비를 넘겨준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777(정조1) 권철신,권일신,이승훈,정약종,정약전,정약용이 서양학문과 천주교리 학문 연구
시작함.
양근에 사는 권철신은 강학회를 주도하였고, 아우 권일신과 유학자 10여명이 모여 일주일 넘게
강학회 개최했다.
이 강학회는 엄숙하고 빡빡한 일정이었다.
명상 -소세 -기도 -아침식사 -오전 강학(토론) ―정오에 오전을
성찰 -점심식사 -오후 강학 -잠들기 전 반성과 명상.
1783(정조7)―이벽 주어사 강학회 참석, 천주교리 연구회로
발전함.
1777년 남인 학자 권철신이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었는데 정약전 등 남인 소장학자 10여명이 참석하여 심오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몹시 추운 눈길을 단신으로 100리나 달려가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참석한 모두는 그의 기개에
탄복했으며 그곳에서는 천(天)세계, 인성 등 수많은 주제를 놓고 심각한 토론을 계속하였다.
이때 이들은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 산수, 종교
등에 관한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대로 실천해보기로 하여 매월 7.14.21.28일에는 일을 쉬고
묵상에 잠겨 재계(齋戒)를 엄격히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사제도 없이 강론 한 번 듣지 않고 서책만으로 알게 된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천주공경가' '십계명가'를 서민들이 알아듣기 쉽게 천주교 교리에 곡을 붙여지었다.
그들의 학문적
연구는 종교적 갈구로 변한다.
학문적 갈구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터득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진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앞자리에 선 사람이 광암
이벽이어서 초대교회 건설의 첫 번째 공로자로 모시는 것이다.
1783-(한국가톨릭의 시작)-(한국교회의 머릿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의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 받음.
1784(정조8)― 이승훈 베드로 귀국. 9월에
이벽에게 세례 줌. 명례방 신앙공동체 탄생. 성직자 없는 조선교회 창설.
1783년 겨울, 조정에서 북경으로 동지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이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이 소식을 듣고 친구인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에 관하여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하고 북경의 천주당에 찾아가 신부에게 교리와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 등을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구해오라고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천주교를 전혀 모르고 있어 크게 놀랐으나 이벽의 강론을
듣고 서학서적 몇 권을 빌려보고 난 후 그를 스승처럼 받들게 되었고 그의 부탁을 꼭 실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에서 40일간 머무는 동안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를 만난다.
이승훈과 그라몽 신부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필담으로 대화를 했는데 뜻이 잘
통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의 시간이 흘러 귀국할 날이 돌아오자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청한다. 그라몽 신부는 세례에 앞서 이승훈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복음전파와 그 내용을 년1회 북경에 보고해야 한다.
2. 천주교는 일부일처제이므로, 축첩은 허용되지
않는다.
(*1789년 이승훈이 한국의 천주교 교세를 보고한 편지가 북경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와의 두 가지
약속을 지켰다고 짐작됨.)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고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동료 신부에게
보낸 그라몽 신부의 편지에는 이승훈을 "조선의 천재 선비로 칭하고 한국교회의 머릿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느님의 복음이 이 땅에 처음 선포된 것은 1784년 봄 이승훈 베드로가 교리책, 십자고상, 상본, 성화 등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시작된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승훈이 구해가지고 온 서학서를 받고 이벽은 즉시 외딴집을 세내어 수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이벽은 이승훈과 다산 정약용을 만난 자리에서 "이것은 진리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은총이 담긴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 소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세례명을 세례자요한으로 정한 이벽은 "나는 구세주가 우리 민족에 오시는 길을 닦겠습니다."고
했다.
이승훈에게 이벽 세자요한,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세례를 받고,
이벽에게 정약용 세례자 요한, 형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세례를 받았다.
선상강화 -1783년 봄 다산의 큰형수 기일에 마현으로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모였고 이벽은 누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제사 후 4.15일 정씨 형제는 이벽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배 안에서 천주는
존재하는가? 과연 한 분이신가? 천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영혼의 문제와 사후의 세계 등을 토론하였다.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황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달레 신부는 이벽의
'선상강화'(船上講話)라고 한다.
훗날 정약용은 만년에 이때를 회고하며 ‘광암 이벽이 오래 살았더라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
학자였으리라’며 존경을 표했다.
(유학과 서학의 대토론)
이승훈과 이벽은 신앙실천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젊은 선비들이 서학에 물든 것을 걱정한 당대를 대표하는 유림 이가환은 이벽(30세)을 설득하리라 마음먹는다.
이가환과
이벽의 논쟁은 우리 전통문화와 계시 진리가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서학에 관심 있는 많은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3일 밤낮을 토론한다.
다산 정약용 묘비에 토론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이렇게 전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환의 논지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이벽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나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를 끊어냈다."
3일 후 이가환은 이벽의 말이
옳다며 승복한다.
"자네 말이 옳네. 그러나 그 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이는 백 년
동안 계속된 박해를 예언한 말 같다.
이가환은 이벽의 논리를 인정했으나 천주교 신자는 되지 않았다.
이벽은 '천주교 교리가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교리대로 살아야 신자다'는 것을 깨닫는다.
명례방 김범우 댁 집회와 복음
선교.
이벽은 신앙의 전파를 가속화하기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이들을 생각했다.
양근(양평) 고을은 서울을
오가는 삼남지방 선비들이 묵어가던 곳이었다.
이벽은 양평에 사는 권일신, 권철신 형제를 눈여겨보는데 권철신은 5형제 중 장남이었고 형제들이
모두 지식과 덕망을 갖추어 전국에서 모여든 제자들이 많았다.
이벽이 1784년 9월에 권철신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입교를
망설였다.
그러나 그의 셋째 동생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파하였다.
권일신은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되어
이승훈, 이벽과 함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제자인 이존창은 고향인 내포로 가서 그곳에서 수많은 이들을 입교시켜 충청도를,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시켰다.
이벽은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중인 계급의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지황을
입교시켰다.
김범우는 역관인데 이벽과 친교를 맺고 지내다가 1784년 이벽에게 천주교리를 배웠다.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등이 모여서 기도하고 교리를 연구하고 선교하는 신앙집회를 계속하였으나 부친의 강력한 반대로 1784년 음력 10월에 명례방
김범우의 집(명동 성당 터)으로 옮겨 지속하였다.
한국교회의 출발은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종 등이 모여서 기도하고 교리를 연구하고
선교한 때로 보고 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명례방 집회로 보고 있다.
(*100년 후 블랑 주교는 한국 교회의 성지,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사서 기념성당을 지었다. 바로 종현성당(명동성당)이다. 한국교회 창립 기념성당의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가
전해지려면 선교사가 파견되어야 하는데,(일본 선교-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중국 선교- 마테오 리치 신부) 한국천주교는 선교사도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아왔는데 세계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한국교회를 '평신도의 교회'라고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국교회사에는 독특한 사례가 나온다.
홍유한과 허균은 세례를 받지 않고
신앙실천운동을 한 사람이고, 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공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나온 것이다.
한 교회가
시작되려면 교리가 있고 교단이 형성되고 신자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으로 보면 한국천주교회 성립이 완전한 때는 주문모 신부 입국
후(1794년)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교황청에서는 1784년을 공식적인 한국교회의 시작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이 고의로 만든 가짜가 아니라면 세 가지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교회의
출발을 1784년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보면 한국천주교회 시작을 임진왜란이나 허균과 홍유한이 신앙생활
실천운동을 한 때로 볼 수도 있고 강학회 때부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교황청에서는 1784년을 한국교회의 시작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김길수 교수 강의-하늘로 가는 나그네 상,하(가톨릭다이제스트 엮음).
굿뉴스의 가톨릭 사전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