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하느님 현존 수업 - 박종인 신부 (가르멜 수도회)

Skyblue fiat 2016. 12. 16. 11:45

 

하느님 현존 수업 - 박종인 신부 (가르멜 수도회)

 

 

실제로 성당이나 성체조배실이나 기도 방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를 한다고 할 때에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 기도를 가지고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가지고 할 때에 14처를 돌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1처, 2처, .. 14처까지 합니다. 또 묵상과 기도문은 생략하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기도를 합니다. 구송 기도라도 잘 드리면 우정의 나눔인 마음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대상을 찾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주님의 기도로 들어갑니다. 이 때 뜻을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과 눈을 맞추는 데에 더 중점을 둡니다. 분심이 들더라도 분심을 없애느라고 애쓰지 말고 의지는 주님께로 향합니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이 수난의 장면이 현재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한 다음 믿는 것입니다.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눈을 맞추면 됩니다. 주변 상황을 생각하느라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예수님과 눈을 맞추면서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모님과 눈을 맞추고 실제로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성모송을 드립니다. 그러면 성모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광송을 한 다음 어머니께 청하오니... 하면서 마음 속으로 제 2처로 갑니다.

 

제 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이 때에도 묵상과 기도문은 생략하고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주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 때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므로 우리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을 동반해야 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14, 6 참조) 그리고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 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 30)라고 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라고 해도 됩니다. 내 안에 가까이 계시므로 멀리 하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성모송으로 성모님을 만나고 영광송을 한 다음 마음으로 제 3처로 갑니다.

 

14처까지 제목을 외우려면 1처, 2처만 알면 쉽습니다. 제 1처 사형 선고 받으심, 제 2처 십자가 지심 그 다음 3처, 7처, 9처는 넘어지시는 장면이고 4처, 5처, 6처, 8처는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4처에서 성모님을, 5처에서 시몬을, 6처에서 베로니카 그리고 8처에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만나십니다. 10처에서 옷 벗김을 당하시고 11처에서 못 박히시고 12처에서 돌아가시고 13처에서 내리시고 14처에서 무덤에 묻히십니다. 1처부터 14처까지 그 장면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매번 그 장면에 머물면서 묵상을 하는 것보다는 묵상을 생략하고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을 만나고 성모송으로 성모님을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매번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드리기 전에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내 안에서 바라보시고 계시다고 믿으면서 눈을 맞추고 마음이 통한 상태로 들어야만 참다운 만남의 기도가 됩니다. 성모님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 계신 성모님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계신 성모님을 신앙의 눈을 만나 뵙는 것인데 천국에 가서 만나 뵐 바로 그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자는 것은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고 성모님을 생생하게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면 우정이 깊어지고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 때에는 마음이 하나가 되고, 드리고 싶어집니다. 갚음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참 사랑인데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롭고 쓸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편태를 맞으시고 감옥에 갇히셨을 때 외롭고 쓸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은 하룻밤뿐이었지만 나는 매일 같이 감실 안에 있으면서 그리고 너희 마음 안에 있으면서 나에게 눈길을 주나 하고 기다렸건만 너희는 나를 외면하였다고 슬퍼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혼자 계시도록 내버려두고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것입니다. 어느 복녀에게 "나는 원한다, 원한다, 원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하고 여쭈었더니 "나에게서 단 15분 동안만 눈을 떼지 말아다오."하고 애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기도나 묵주기도를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잠깐 바라뵙고 성모송을 드리면서 성모님을 잠깐 만나 뵙는 것은 묵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기도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이 생각이나 묵상만 하는 것은 아직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 기도를 가지고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과 눈을 맞추면서 드렸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현존 체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장면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고 성모송으로 성모님을 생생하게 만나자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그것은 마인드 컨트롤에 지나지 않겠지만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가 신앙으로 기도 안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것은 참된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계신 성전인 줄 모르십니까?" (1코린 3,16) "여러분은 성령이 계신 성전" (1코린 6,19)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성전" (2코린 6,16)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낙제생 (실격자)인 것입니다."(2코린 13,5)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므로 묵상보다는 하느님 현존 수업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순수 영이나 천사가 아니므로 순수 영이신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을 토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 곧 성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요한 1,1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 14, 6)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 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 30)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사이가 되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아빠라 하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엄마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화살기도로 쉽게 끊임없는 기도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 기도란 우리르 사랑해 주시는 분과 함께 자주자주 단 둘이서 우정을 나누는 것인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8, 5 참조)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주님과 눈을 맞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사랑과 이탈 - 집착이나 애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짐-과 겸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기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묵주 기도도 위와 같은 요령으로 묵상을 생략하고 현존 체험 기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