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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얼마나 좁은가 - 십자가의 성요한(가르멜의 산길)

Skyblue fiat 2016. 12. 14. 12:28

<가르멜의 산길>

 

제7장.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얼마나 좁은가, 

그 길로 가야 할 사람들은 얼마나 발가벗고 매인 데 없어야 하는가를 들어서 말함.

이성(理性)의 말끔 벗음을 말하기 시작함.

 

 

1. 이제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의 벗음과 맑음을 다루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내 것 이상의 뛰어난 지식과 정신이다. 그러한 지식과 정신이 있어야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 얼마나 좁은가를 영성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이 밤 속에서 영혼의 능력을 비우고 벗어버리는 일이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를 구하신 주께서 성 마태오를 통하여 그 복음에서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 길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문은 좁고 길은 비좁아서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7,14) 이 권위의 말씀에서 특히 주의할 것이 있다. 저 “비좁아서”라고 하는 낱말에 담긴 강세와 강조다. 정녕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좁다는 말씀이리라.

 

명심할 것은 먼저 문이 좁다 하신 말씀이니, 영혼의 길이 시초인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면서 감각적 및 시간적인 일체의 것에서 벗어나 긴장된 의지를 가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위에서 말한 ‘감성의 밤’에 속하는 것이다.

 

 

3. 그 다음, 길이 비좁다 함은 완덕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완덕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감성적인 것을 비우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뿐 아니라 영에 딸린 것마저 벗고 비워서 스스로 홀몸이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좁은 문을 인간의 감성면에 비긴다면, 비좁은 길은 영적 및 이성적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찾아내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은 우리의 주위를 그 원인으로 돌려야 할 것이니, 정신을 온전히 비우고 말끔히 벗어버릴 줄을 알거나 그럴 마음이 있는 사람이 적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완덕의 높은 산으로 오르는 이 길은 위로 갈수록 좁디 좁아져, 아래에서 당기거나 위에서 헤살놓는 그런 짐을 가지지 않은 나그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찾고 얻자는 일인만큼, 찾고 얻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인 것이다.

 

 

4. 여기에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짐을 벗어야 할 뿐 아니라, 정신에 딸린 것도 모두 털고 없애면서 가야 된다 함이다. 그 때문에 우리 주께서는 우리를 깨우치시고 이 길로 인도하시느라 저 훌륭한 가르치심을 마르코 복음 8장 34-35절에다 말씀해두셨다. 이 놀라운 가르치심이 더없이 필요한 것임에도, 영성인들이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례가 아주 적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가르치심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익하므로 여기 전부를 인용하여 그 바른 뜻과 영성적인 의미를 밝히겠다. 그 가르치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5. 아아 이 교훈이 무엇인가를 누가 당장 밝혀주고 수행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영성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길을 가는 법칙이 어떻다는 것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끊으라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세속을 멀리하거나 무엇을 변경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의 형식 밑에 덕을 닦고 기도를 계속하고 절제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님이 타이르시는 말끔 벗음과 가난과 이탈과 영적 순결 (이것들은 결국 하나임)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하느님을 위하여 일체를 끊고 벗어나기보다 오히려 위로나 영적 감각 등으로 자기의 본성을 먹이고 입히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속에 있는 것을 끊으면 다 되는 줄로 알지만, 영스러운 것에도 역시 끊어야 하고 씻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 딸린 온갖 맛을 없앰인 견실하고 완전한 무엇에 부딪친다든지, 마음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가난 정신에 딸린 말끔 벗음인 건조 무미와 고생을 만나게 되면 이것을 죽음과 같이 피하고, 하느님 안에서 그저 달콤하고 맛스러운 사귐만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부정도 아니고 영의 적나라도 아니다. 다만 영의 탐욕일 따름이다. 이런 탐욕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만들어버리는 셈이니, 참다운 영은 하느님 안에서 맛있는 것보다 맛없는 것을 찾고, 위로보다도 고생을, 모든 것을 가지기보다 하느님을 위하여 아쉽기를, 달콤한 사귐보다 메마름과 괴롭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름이요 자기 부정이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찾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남임을 잘 아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 안에서 자기를 찾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낙을 찾는 것, 그러나 자기 안에서 하느님을 찾음은 하느님을 위하여 그런저런 것이 없기를 바랄 뿐 아니라, 하느님이나 세상으로부터 보다 맛없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골라잡는 것으로, 이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다.

 

 

6. 이 자기 부정이 어디까지 미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는지, 이를 깨우쳐줄 수 있는 사람이 아아 누구이겠는가? 이 부정이야말로 정녕 하나의 죽음, 만사에 있어 현세적, 자연적 및 영적인 하나의 멸각! 마음으로 일체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요한 12,25)라고 하신 말씀은 이를 가리키심이라 볼 수 있는데, 풀어 이르면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찾고 가지려는 이는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나, 나를 위하여 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이는 그 생명을 얻으리라 하심이다. 말하자면 그 의지가 갈망하고 맛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끊어버리고 보다 큰 십자가인 것을 골라잡는 사람 (이것을 주께서는 성요한을 통하여, 제 영혼을 지겹게 여김이라 하셨다.), 그가 바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당신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주십소사 하던 두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로서, 그런 영광을 청하는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아니하시고, 즐거운 일보다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안전한 일로서, 당신이 마셔야 할 잔을 그들에게 내주셨다. (마태 20, 22).

 

 

7. 이 죽음이란 자아의 자연성에 대한 죽음이다. 완덕의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감성계와 앞으로 말한 영성계의 자연성에 딸린 모든 것, 이를테면 알기와 즐기기와 느끼기의 일체를 벗어버리고 없애버리는 그 죽음이다. 따라서 어느 무엇을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도 좁은 길에 거추장스런 것은 있어서 안 되는 것이다. 주께서 깨우치신 대로 이 길에는 자기 부정과 십자가만이 있기 때문인데, 십자가는 이 길을 올라가는 데에 필요한 지팡이... 이것이면 부정도 한결 가볍고 쉬운 것이다. 우리 주께서 성 마태오를 통하여 “사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11,30)라고 하신 것은 이 때문이니, 이는 바로 십자가를 뜻함이다. 자기를 굽혀 이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하고 매사에 하느님을 위하여 진정 고생을 사서 하고 그 고생을 짊어지려는 사람이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무슨 일에든지 예사롭지 않은 편함과 가벼움을 발견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 것이거나 당신 아닌 딴것이거나, 조금이라도 애착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가지고 싶어하면, 그런 사람은 일체를 벗거나 끊고 가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좁은 길로 들 수 없고 위로 오르지도 못할 것이다.

 

8. 그러므로 영성인들에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하느님의 길이 생각을 많이 하는 데 있다거나, 여러 가지 방법과 약식 또는 맛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길은 오직 한 가지 필요한 일에 있으니, 겉으로나 속으로나 정말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것, 그리스도를 위하여 괴로움을 떠안고 무엇에나 자기를 없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닦아나가면, 위에서 말한 것은 물론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수행에 결함이 있을 경우, 이것은 온갖 덕의 일체요 근본인만큼 천사와 같은 숭고한 생각, 하느님과의 사귐을 가진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방법은 지엽과 같으므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당신께서는 성 요한을 통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14,6)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대목에서 이르시기를 “나는 문입니다.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입니다.” (10,9)하셨다. 그러므로 무릇 편하고 안이한 길로 가려 하고, 그리스도를 본뜨기 싫어하는 사람은 옳다고 볼 수 없다.

 

9.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길이라 하셨다. 이 길은 우리의 감성과 영성에 있는 자연성에 죽는 길이므로, 우리의 본보기요 빛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가지고 그 죽음이 어떠한가를 설명하겠다.

 

10. 첫째, 그리스도께서 감성면에 죽으신 것만은 확실하다. 즉 살아 계시는 동안은 영적으로 죽으셨고, 자연적으로는 돌아가실 때 그러하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사실 때는 머리 누일 자리마저 없으셨고, 돌아가실 때는 더더욱 그러하신 것이다.

 

11. 둘째, 당신이 돌아가시던 그 순간, 영혼엔 조금도 편한 구석이나 위로가 없이 오로지 멸각의 상태에 계셨음이 분명하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의 하부에 처절한 메마름을 남겨두시었으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6) 하는 부르짖음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 생전에 느끼신 가장 사무치는 저버림이었다. 한편 이 저버림으로써 당신은 평생에 이루신 그 많은 기적과 일들보다 훨씬 더 큰 일, 그리고 하늘에도 땅에도 일어나지 않은 크나큰 일을 하시었으니, 은총으로써 전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결합시키신 바로 그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이 이룩된 때가 바로 우리 주께서 당신을 온전히 멸각하신 그때요 그 순간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당신의 죽어가심을 보고 존경하기보다 조롱을 했으니 영예를 멸각하셨고, 자연성으로 볼 때 죽음으로 그 자연성은 없어진 것이요, 아버지의 도우심이나 영적 위로 역시 멸각되었으니,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드님이 빚을 다 갚아드리고 인간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도록,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없애시고 무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 때문에 다윗은 그리스도를 들어서 말했다. “저는 멍텅구리, 알아듣지 못했나이다.” (시편 72, 22) 이것은 착한 영성인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 즉 그리스도의 문과 길을 깨치라는 것,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없애면 없앨수록 그만치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그만치 큰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 함이다. 사실 무로 돌아간 채로 있으면 그때야말로 겸손은 극치에 달하고 영혼과 하느님과의 영적 합일이 완성되리니, 이것은 바로 이승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높은 단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합일은 휴식이나 맛이나 영성적 감동에 있지 아니하고, 감성과 영성 즉 안팎으로 당하는 십자가의 뛰어난 죽음에 있는 것이다.

 

12. 이른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실상은 그리스도를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할 말이 많으나 더 이상 길게 끌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맛을 찾기는 하나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고통과 죽음을 구하려 들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들을 두고 말하고 있으니, 그들은 위대한 학자, 권력가라면서 그리스도를 떠나 먼 고장에서 사는 사람들, 야망과 출세에 안달하면서 이 세속을 사는 사람들 ... 그들의 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결국 쓰디쓸 뿐이리라. 그들에 대해서 여기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심판날에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당신 말씀의 표적으로 삼으셨으니, 그 가진 학식이나 높은 지위로 보아 그들이야말로 앞장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어야 옳을 사람들이니 말이다.

 

 

13. 아무튼 지금 우리는 영성인, 특히 하느님의 은혜로 관상의 상태에 있는 이의 이성을 다루고자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특히 이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관상의 이 좁은 길로 들어가려면, 자기를 좁히면서 어떻게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또 이에 어긋나는 사물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씻어야 하는가를 이제부터 말해보기로 하자.

 

 

(가르멜의 산길 / 십자가의 성요한 / 최민순 신부님 번역)

 

 

 

 

 출처ㅣ http://blog.naver.com/aria_company/220632735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