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보기 싫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Skyblue fiat 2016. 12. 2. 08:35

37. 보기 싫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내가 보고 싶어하는 나의 어떤 면만 보려고 하지, 보고 싶지 않은 여러 면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나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은 미운 사람들, 즉 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며 나의 원수들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보기 싫어하는 나의 어떤 면을  내가 미워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니까 - 물론 미워하기는 하지만 표현을 못하고, 못 보니까 -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영락없이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안 보려고 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원수가 아니라 은인입니다.그런데 그 사람을 원수로 삼는가, 은인으로 삼는가는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계산하기 나름입니다. 계산을 잘못해서사람을 계속 피하고, 결국은 나를 피하고 다니면 행복할거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나의 좋은 면만 가지고 계속 포장하며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렇게 살면 우리는 결국 위선자가 되고, 자기를 정말 미워하게 되며, 정말 열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반면에 당장은 괴롭지만,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 안에 내가 싫어하는 면을 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양심성찰이나 의식성찰 그리고 영성수련을 통해서 보기를 연습한다면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왜냐하면 해방이 되지 않는 나를 이제 개척해 가는 것이기에 남의 떡이 커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고귀함을, 내 영역의 넓음을,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와 하느님 사랑의 깊이를 새롭게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그것이 바로 자기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면에서 죄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오 복된 죄여 ! 죄를 깨닫지 않으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십계명을 다 지켰어도 죄인입니다. 하루종일 사랑했어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가장 훌륭한 성인은 가장 많이 자신의 죄를 안 사람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점은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많이 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죄를 안 짓는다고 착각하는 위선자 보다는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죄를 감추느니, 죄를 짓고 통회하는 것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성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코, 제 주보 성인인 성 안젤모, 성 어거스틴은 한때는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죄를 지어 봤기 때문에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물론 죄를 별로 짓지 않고도 노력으로 도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부처님같은 분이 아마 그런 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영성은 '죄의 영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영성이라고 하겠죠?

 

    우리가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예수회 수련원에 1979년 봄에 입회하여 나흘째 되는 말부터 第一(제일) 수련을 시작했습니다.수련 첫날에 수련장 신부님께서 저에게 "왜 변수사님은 왼손을 감추십니까?" 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당황하면서 "제가 언제 왼손을 감추었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고삐를 늦추지 않으시고 "지금도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지 않나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래 바라보니 제 왼손이 제 왼쪽 바지 주머니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제 손이 왼쪽 주머니에 있는 것을 정말로 몰랐습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 "아 ! 그렇군요." 하면서 문득 어머니께서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저에게 몇 번 하신 질문을 상기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희선이는 왜 왼쪽 바지 주머니가 더 때가 많은지 모르겠네," 하셨고 저는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곤 했지요.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수련장 신부님께서 이 이야기도 해 드리면서 "제가 왼손을 계속해서 감추어 왔던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님께서 "변 수사님,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어려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수사님 수련을 그 감추어진 왼손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저는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부터 무엇인가 정말 가슴에 찡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부분적으로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잠자면서 동시에 깨어 있다는 착각도 하면서, 이런 착각 속에서 오늘 이자리에 나와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왼손을 살짝 감출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감추어져 있고, 감추고 싶은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바로 '나'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인가요? 사무엘서에서 다윗이 나단 예언자가 신랄하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듣고 한 말은 '그가 바로 저입니다.'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성수련은 남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수련은 남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성수련은 내 것을 꺼내 내 것을 가지고 수련을 하는 것일뿐 남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수련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주님과 만남을 연습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영성수련의 목적인 자기자신을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학을 정리하고, 남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이것저것 객관적으로 다른 것들을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자기자신' 은 정리하지 못합니다.

 

영성수련 교육학/이냐시오 영성 연구소

http://apjohan.blog.me/10043699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