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기도란 무엇인가? -아일린 조지

Skyblue fiat 2016. 6. 18. 23:56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저 하느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말하고 또 말하지만 하느님은 제게 귀기울이지 않습니다"라고 제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입술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느님의 귀는 여러분에게로 맞추어집니다. 그분은 "나의 자녀가 말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러분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모든 훌륭한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어떤 기도도 하느님께서는 흘려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이시며 응답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대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수년간 백만불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하고 부름과 동시에 "그래, 아가야"라고 하시며 그분은 여러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어린 동생이 형에게로 오면 그는, "아이구, 날 괴롭히지마, 난 바빠"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엄마, 이걸 좀 도와주실래요?"

 "집안 일이 다 끝나면."

"아빠, 이 일을 좀 도와 주시면 어떨까요?"

"아들아, 난 이 보고서를 끝내야 해."

큰 형이 일이 끝나게 되면, "좋아, 이제 들어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어린 꼬마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려고 번개처럼 달려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시간을 내주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절 좀 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분은 즉시 "그래"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들을 뒷전으로 미루어 놓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십니다. 그분에게 좀더 자주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분을 위한 시간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을 필요로 할 때만 그분을 찾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우정이란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정이란 좋을때나 나쁠때나 언제든지 서로를 위해 우리 자신의 시간을 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이러한 종류의 친구, 동료, 형제로서 또는 신비의 배우자, 하느님의 아들로 그분을 연관시키도록 배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연관시키고 그분을 위한 시간을 내는 것을 시작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찾으리라 기대하고 계시는 이 시간을 우리는 '기도 시간'이라 부릅니다. 기도 시간은 무릎을 꿇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집 주변이나 사무실, 혹은 마당이나 정원 등 여러분의 환경이 허락하는 곳 어디서든지 예수님께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분,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일과 중 조용한 특별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며 여러분 일과의 매 순간이 기도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위해 시간을 냅니다. 의사와의 약속과 같은 이런 모든 약속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선 그만큼의 시간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시간을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왜 우리의 사랑인 예수님께는 그분의 몫을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전 생애는 그분에게 응당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 삶의 황혼일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분은 "나는 밤중에 도둑처럼 찾아온다. 너희는 그 날도 그 시간도 모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분 앞에 서서 '전 시간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천국에 대한 성스런 기대와, 그 곳에 영원히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열광은 하느님 자녀의 가슴에 점화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어느날엔가 그들을 부르러 오시리라는 기쁨이지 슬픔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이제 슬픔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의 시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