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 네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기도 안에서 행하는 활동에 관하여
침묵 기도에 대해서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리는 중에는 영혼이 무감각하고 죽어 있으며 빈둥거린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침묵 기도 단계에서 전보다 더 활발하게 행동하고, 그 활동 범위도 더욱 커지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 기도 단계에서는 하느님 스스로 영혼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영혼은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의 인도" (로마 8,14)에 따라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은총의 인도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제키엘이 이것을 훌륭한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이 예언자는 바퀴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 바퀴에는 생명의 기운이 올라 있어 그 기운이 바퀴들을 이끌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바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기운이 움직이는 대로 바퀴들은 치솟아 오르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퀴들은 결코 뒤로 굴러가지는 않았습니다(에제 1,19-21 참조), 영혼도 이러한 방법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영혼 안에 계시는 생명을 주는 성령께서 영혼을 움직이고 이끌어야 합니다. 영혼이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야지 다른 것을 따르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영혼이 뒤로 가도록 인도하지 않습니다. 즉 다시 피조물에게 되돌아오거나, 자기 자신으로 구부러지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이 그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영혼의 이런 '활동' 은 휴식이 넘치는 활동입니다. 영혼이 스스로 행동하면 자기 활동을 더 분명히 알아차리기 때문에, 영혼은 애써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은총의 성령에 따라서 행동하면, 마치 영혼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행동은 자유롭고 가벼우며 자연스럽습니다.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시어 나를 구하셨으니,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네" (시편 18,20).
영혼이 '중심을 향한 비탈길' 에 서게 되면 (11장 참조), 즉 영혼이 정신을 집중하여 스스로의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면, 바로 그 순간부터 영혼은 매우 힘차게 활동하며 중심을 향해 움직입니다. 이 중심은 영혼을 자기 쪽으로 당기는데, 다른 모든 행동들의 속도보다 훨씬 빠릅니다. 중심으로 당기는 이 힘과 견줄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하나의 활동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탁월하고 평화롭고' 조용한 활동입니다.
바퀴가 적당하게 움직이면, 사람은 바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퀴가 매우 빨리 움직이면, 바퀴에서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곁에서 쉬고 있는 영혼은 한없이 고결하고 탁월하면서도 몹시 평화롭게 활동합니다. 평화로울수록 영혼은 더 빨리 달립니다. 그를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 끌어 당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에게 달려 오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은 말합니다. 나를 당신에게 끌어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아가 1,4), 오! 나의 '거룩한 중심' 이여, 내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당기세요. 내 힘과 감각은 이 유혹에 끌려 당신에게 달음질칠 것입니다. 이 유혹이 치료하는 향유요, 끌어당기는 향내입니다. 그 여인 은 '당신의 값진 향내 쪽으로 우리가 달린다'고 말합니다. 그 것은 '아주 강한' 인력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무척 자유롭게 뒤따르는 힘입니다. 강하면서 그만큼 부드러운 이 힘은 힘있게 당기고 부드럽게 들어올립니다.
신부가 말합니다. "나를 당신에게 끌어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그녀는 자신에 관해서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를 끌어주셔요. 이는 당기는 힘이 나오는 중심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 달려가요. 이것도 일치이자, 영혼이 이끌려 가면서 모든 힘과 감각도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결코 '게으름을 피우며 지내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는 '하느님의 성령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17,28). 이렇게 하느님의 영에 부드럽게 의존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며, 이를 통해 영혼은 짧은 시일 안에 자기가 창조된 단순성과 유일성에 이르게 됩니다.
영혼은 하느님처럼 유일하고 단순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대로 창조된' (창세 1,27 참조)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단순성과 유일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행위의 다양성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유일하고 다양" (지혜 7,22)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유일성은 그분의 다양성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성령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유일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자체로서 하느님과 함께 같은 성령을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는 한, 유일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밖으로는 다양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쉬지 않고 행동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스스로 활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릅니다” (지혜 7,24). 그러므로 지혜의 활동에 의지하여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매우 잘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요한 1,3),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성령을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 2,7 참조). 성부의 모습' 인 말씀의 기운이 참여하여 하느님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던 그때,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유일하고, 단순하며, 순수하고, 내적이며, 항상 풍요롭습니다.
악령이 죄를 통하여 이 아름다운 모습을 타락시키고 파손시켰기 때문에, 속죄를 위하여 창조 때 우리에게 불어넣어진 것과 같은 말씀이 꼭 오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말씀이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성부의 모습이기 때문이며, 그 모습은 그분의 행동으로 회복되지 않고 그것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분의 행동을 견뎌냄으로써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행동’ 은 하느님의 행동을 견뎌내는 상태로 '놓아 두어야 하며, 또한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빚어질 기회를 말씀에게 주어야 합니다. 모습이 움직이면 화가는 그를 그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으로 만들어낸 모든 움직임은 이 훌륭한 화가의 작업을 방해하여 윤곽을 틀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용히 있어야 하며 단지 성령께서 우리를 움직이실 때에만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 5,26). 더욱이 그분은 살아야 하는 모두에게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움직임인 성령은 교회의 성령이십니다. 교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며 보잘것습니까? 교회는 움직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움직이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교회의 성령은 지체 안에 계시는 성령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안 됩니다. 그 영은 바로 교회 자체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체가 교회의 성령 안에 머물러 있으려면 거룩한 움직임인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좀 더 '고귀하다' 는 것은 명백합니다. 확실히 사물은 그것을 시작한 원칙이 고귀하고 크고 탁월한 그 정도로만 가치를 지닙니다. 거룩한 원칙에 따라 행해진 행동들은 ‘거룩한 행동' 입니다. 반대로 피조물의 행동들은 아무리 좋게 보일지라도 '인간적 행동' 이며, 은총으로 행해졌을 때에만 덕을 갖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모든 존재는 단지 빌어온 생명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퍼져 나가는 특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게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 코린 5,17) 하고 단언하였습니다. 그 말처럼 우리가 아담의 생 활과 자신의 행동을 비우고 잃게 될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죽고 자신의 행동을 포기하면, 하느님의 행동이 대신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결코 사람이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하느님의 활동이 피조물의 활동 공간을 차지하도록, 하느님의 성령에만 의지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오직 피조물의 '동의' 가 있어야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활동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피조물이 자신의 행동을 '절제' 때만 그가 동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이러한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르타가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자신의 영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나무라셨습니다. 인간의 영은 불안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은 많이 일하는 듯이 보여도 조금밖에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마리아는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평화, 휴식 그리고 고요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따라 움직이려고 겉으로 드러나게 행동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사시게끔, 스스로 사는 것도 그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스스로를, 또 자신의 행동을 포기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고무되어야만 그분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께 양보해야만 성령께서 우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코린 6,17)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과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저는 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는다고 말했습니다(시편 73,28). 하느님 곁에, 그분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치의 시작입니다.
일치가 시작되고, 계속되고, 완성되어서, 성취됩니다. 일치의 시작은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앞서 말한 방법 대로 내면으로 향한다면, 영혼은 중심으로 끌려가고 일치하고자 하는 강한 성향을 갖게 됩니다. 이 성향이 시작입니다. 이어서 영혼은 하느님께 속하게 되는데, 이 일은 하느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갈 때 일어납니다. 그러면 영혼이 하느님께 묶여지고 곧이어 하나가 됩니다. 즉 하느님과 더불어 같은 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 영은 자신의 목적을 향해 다시 갑니다.
사람은 신적인 움직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이 길로 꼭 들어서야만 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8.9)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성령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고, 우리의 영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는 같은 대목에서 하느님의 인도가 필요하다 고 증명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로마 8,14).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영은 신적 움직임에 따라 사는 영입니다. 바오로는 계속하여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15). 이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 8,16).
영혼이 하느님의 영에 따라 움직이자마자 영혼은 즉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명을 발견합니다. 이 증명으로 '영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를 약속받았고, 그가 받은 성령은 노예의 영이 아니라 자유의 영임' 을 더 잘 알게 되면서 더욱 기뻐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굳세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한층 더 자유롭고 경쾌하게 행동함' 을 느낍니다.
신적 움직임의 성령께서는 모든 일에 꼭 필요한 존재이신 데, 바오로 사도는 그 이유를 우리가 간구하는 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고 또 그것을 훌륭히 청할 수 없으면, 그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는 그것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이 성령은 하느님 말씀의 성령입니다. 그분 자신이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라고 말씀하셨듯이, 이 말씀의 청은 늘 이루어 집니다. 만약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청하고 기도하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항상 응답받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훌륭한 사도이며 신비주의의 교사요, 내면의 스승인 바오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 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7), 즉 성령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에 일치해서만 간구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 받고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완성에 필요한 것을 청하십니다.
왜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에 짓눌려 우울해하며, '휴식에 머무르자'고 말하지 않고 여러 여행으로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이사 57,10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 당신 옆에서 쉬도록 손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선을 향유하기 위해서 할 일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혼이 지닌 힘과 부와 보물을 수많은 외적인 일에 소모한다고, 이사야는 믿기 어렵다는 듯 탄식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고 하십니다.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이사 55,2).
이러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행복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영혼이 얼마나 강해지는지를 그대들이 알게 된다면!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즈카 2,17),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면 모두 물러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우 특별하게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내맡기는데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좀 더 거리낌없이 우리를 내맡기도록 하기 위해서 이사야를 통해 확신을 주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기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5). 오! 완전한 위로의 말씀이여! 하느님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기를 아직도 두려워하는 이는 누구인가?
- 네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 기도에 이르는 짧고 매우 쉬운 길 [개정판]
잔 마리 귀용 지음 / 한연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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