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주님

나의 삶은 어떠한가? 비극적이기를 넘어 마귀 들린 수준은 아닌가? 무엇을 유지하고 얻기 위해 용쓰는가? 무엇을 거저 받았고 거저 내어 놓는가?

Skyblue fiat 2021. 2. 13. 19:47

 

연중 제5주일[2021. 02. 07] /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마산교구 삼계본당 신부님 강론)

 

 

욥기는 실상 비극이어야 했다. 아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사탄의 요청에 대한 하느님의 허락으로 시험이라는 명분하에 일어난 것이 유치한 일이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인 양 다시 회복된다는 이야기는 거저 삼류 코미디일 뿐이다. 인생은 그렇게 희극일 수 없다. 오늘 욥기 독서 말씀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잘 드러낸다. 직역하면, “내 삶이 한 숨 같기에, 내 눈은 좋다고 보게 되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7,7ㄴ) 처음으로 좋게 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보실 때마다, 당신 눈에 ‘좋았다(히브리어로 ‘톱’)’. 반면, 인간은 처음부터 스스로도, 하느님께서 주신 짝도 좋게 보지 못했다. 이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원죄라 칭한다. 욥 7,7에 의하면, 어떤 이유에서건 여태 좋게 보아 온 것은 허상일 뿐이다. 진상을 보았기에 이제 되돌릴 수 없다.

 

사실 그리스인들에게도 삶의 진상은, 실존의 본모습은 비극적이다. 그리스 고전의 거의 모든 주요 작품들이 비극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 이래로 더 이상 비극은 없다.”는 오리게네스의 말을 필두로 그리스도교 영향 하에 그리스 고전들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대문호들의 작품을 통해 비극이 부활한다. 그리스도교적 봉건 사회 체제 하에서는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서민들이 자유를 얻게 되고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되자,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도록 이끌 교육이 필요했다. 주요 교보재로 활용된 것이 그리스 비극들이고 이에 영감 받은 새로운 비극들이다. 비극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비극적 결과는 배반 내지 배신으로 초래되기에, 그러한 잘못 행사된 자유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극의 정점을 찍는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 삼부작<이나,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일방적이고 즉흥적인 신들의 내기나 결정으로 초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 그 이면에 인간의 책임이 있다. 눈이 멀어 제대로 못 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이지 선택을 했다. 삶의 마지막인 죽음도 이제 선택의 대상이다. 어떠한 선택을 하고 살고 죽었는지에 따라 사후 처지도 달라진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지옥 제일 밑바닥에 있는 이들(유다, 브루투스, 우골리노 등은 배반의 대명사이다)은 루치퍼Lucifer가 날개로 일으키는 바람에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는 형벌을 받는다. 글자 그대로 영원한 무기력lethargy 상태에 빠지게 된다. 무기력으로 번역되는 lethargy의 어근을 따져 보면, ‘죽도록lethe 일만 한argy 결과이다. 헛되게 일만 한 결과이다.

 

사실 우리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얻은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일한다. 그럴 때에 우리 삶은 필연적으로 비극이 된다. 비극적이지 않기 위해 영위한 삶이 바로 비극이라는 역설이 대두된다. 게다가 안식일 없는 일상으로 대표되는 6이라는 숫자는 요한 묵시록에서는 사탄의 숫자이다. 그런 식의 비극은 이제 악마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삶이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선, 마귀 들린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선, 욥처럼 그리고 오늘 제 2독서(1코린 9,16-19.22-23) 바오로 사도처럼 받은 것을 그대로 다시 내어놓아야 한다. 진정으로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저 주어진다. 복음 역시 그러하다. 선물로 받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바오로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더 나아가 교부들은 복음은 이미 준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말했고, 이를 fides implicita라 칭했다. 만일 복음의 어느 한 소절이 지금 나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면, 이는 복음을 통해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늘 복음(마르 1,29-39) 속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은, 마르코 복음 내 마귀나 더러운 영을 내쫓은 기적들 사이에 놓여 그것들과 함께,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직후 일으키신 첫 번째 이적에 속한다. 마귀나 열병이 신학적으로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시몬의 장모 상태를 표현하며 ‘누워 있다’로 번역되는 ‘카타케이마이’ 동사는 아래쪽을 향해(접두어로 사용된 ‘카타’는 아래를 의미한다) 머리를 쳐 박은 채 그렇게 꼬꾸라져 있는 것을 표현한다(M. Heidegger의 Verfallenheit!). 누워 있더라도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은 사랑받는 제자가 최후의 만찬 때 견지한 포즈이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직역하면, ‘예수님 품에 머리를 위로한 채 누워 있었는데’)”(요한 13,23ㄱ). 여기서 사용된 동사 ‘아나케이마이’는 위를 의미하는 ‘아나’로 시작된다. 주님을 상대로 가까움/친밀함을 누리되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 이 두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 이유가 이제 열을 의미하는 ‘퓌르’를 어근에 둔 ‘퓌레토스’라는 단어를 통해 밝혀진다. ‘퓌레토스’, 곧 열병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열나도록 그렇게 쉼 없이 달려 burn out된 상태를 의미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열나게 했을까? 주님을 상대로 얻게 된 친밀함을 잃지 않고 더 많이 얻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이러한 쉼 없는 노력이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 뻔했다. 이제 ‘퓌레토스’는 마치 마귀나 더러운 영이 떠나가듯 그렇게 그녀를 떠나간다. 연이어 ‘그녀는 다시금 봉사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1,31). ‘시중을 들었다’를 직역하면, ‘봉사하다(그리스어로 ‘디아코네오’)’이다. 시몬의 장모는 비로소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에 봉사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을 위시해서 누구를 상대로도 친밀함을 유지하거나 더 얻기 위해 용쓰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졌던 친밀함을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렇게 그녀는 복음의 일부가 된다.

 

나의 삶은 어떠한가? 비극적이기를 넘어 마귀 들린 수준은 아닌가? 무엇을 유지하고 얻기 위해 용쓰는가? 무엇을 거저 받았고 거저 내어 놓는가?